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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Mar 31. 2023

누군가와의 한 순간은 평생이지

영화 <비포 선셋> 속 제시와 셀린의 시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를 다 봤다!

나는 거꾸로 맨 마지막 시리즈인 <비포 미드나잇>을 가장 먼저 보았고,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본 영화도 미드나잇이 유일하다. 3편인 미드나잇은 사실 엄청 재미있다거나 기억에 남는다거나 하진 않아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앞의 두 편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3편은 제시와 셀린이 결혼하고 애도 낳고 지지고 볶고 사는 이야기였더랬다. 벌써 8년 전인가.. 인후염으로 병원에 갔다가 갑자기 무슨 마음이 동했던 건지 일산 호수 공원을 산책한 뒤 혼자 보고 나왔는데, 저녁 달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그 날을 기억한다. 그 영화를 보고 끄적여놓았던 한 줄은, 그렇게 싸우고도 다시 사랑하고 웃는 둘을 보며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유머 감각'이 꽤 중요하다는 것과 그러한 유머 감각이 통하는 것도 오랜 시간 함께 한 추억과 시간의 힘 때문일 거라는 것이었다. 그 땐 몰랐던 두 사람의 추억과 함께 한 시간들(물론 2편과 3편 사이에 생략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있었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임과 두근거렸던 순간들이 1편과 2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쩌면 <비포 선셋>은 별 거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배경도 큰 변화가 없고, 별다른 사건도 없고, 주인공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도 거의 없고, 영화 속에서 흐르는 시간도 실제로는 매우 짧다(근데 다 보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이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스토리도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첫만남 이후 9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마음과 이루어지지 못한 순간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는 짤막한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 중반부까지 역시 1편이 최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까지 다 보고나서는 2편이 너무 좋아져버렸다.


에단 호크가 연기한 제시는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던 9년 동안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작가가 되어 파리의 한 서점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하고 있다. 그 서점에 셀린(줄리 델피 역)이 찾아오며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파리 시내를 거닐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 나오지 못했는지, 그 날 다시 만났더라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자신이 늙고 많이 변하지 않았는지 등등… 여행지에서의 짧은 만남이 전부였다고는 하지만 운명처럼 이끌렸던 두 사람이 9년만에 만났으니 어떤 기분이려나..



이 영화를 보면 누군가를 좋아할 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말 잘 느껴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그냥 이 영화의 제시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원래대로라면 제시는 작가와의 만남이 끝난 뒤 곧 뉴욕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야만 했다. 사실 그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 만남이 끝나갈 무렵 셀린이 등장하면서 그에게는 없던 시간이 생겼다. 아니, 그가 시간을 만들어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지 않았느냐고 묻는 셀린에게 "아직은 괜찮아"를 몇번씩이나 연발하는 제시를 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는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또 너무나도 괜찮다.


잠깐만 하기로 했던 파리 시내 산책, 그 끝에 카페에 들러 함께 차를 마시고, 또 다시 여행 가방을 맡긴 기사에게 부탁을 해서, 그렇게 해서까지 제시는 셀린과 유람선을 탄다. 그 매순간이 아쉬운 제시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연장하려 애쓴다. 유람선에서 내린 뒤 안녕을 고하는 셀린에게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제시, 집까지 가는 그 잠깐의 시간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집앞에서 또 한번 멈추었다가 결국 집에 들어가고야 마는 제시.


그는 분명 뉴욕행 비행기를 놓쳤을 거다. 아주 기꺼이.

셀린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그녀 역시 자신을 많이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시는 아주 행복하게 웃는다.

<비포 선셋> 셀린의 노래 - https://youtu.be/6jfoYwxnW9M

(아아아 이런 노래 부르면 어떻게 집에 가냐고.. 그리고 저렇게 웃어버리면 어떻게 보내주지..)


짧으면서도 또 매우 긴 두 사람의 시간.

또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까 너무 짧게 느껴지는 아쉬움이 가득한 시간.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의 짧은 순간이 9년동안 마음 한켠에 간직할 수 있는 긴 시간이었듯, 이 순간들도 또 그 언제보다 긴 시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서는 오래 함께 산 부부의 케미를 보며 시간의 ‘양’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포 선셋을 보고 시간의 ‘질(밀도?)’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와의 한 순간은 평생을 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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