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느 해,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막내 이모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라며 어떤 남자를 데려왔었다. 작은 방에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있던 그때, 엄마가 “ 우리 딸이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우리 큰 딸 보고 와서 이모부될 사람 괜찮은지 좀 보라고 할까”라며 깔깔깔 웃으시더니 나를 불렀다.
으응? 가도 돼?? 진짜???
그렇게 나는 어른들 사이에 끼여앉아 지금의 이모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이모부의 첫인상은 요샛말로 너드남에 가까웠다. 알이 커다란 네모 안경을 끼고, 키는 커보였고 말랐다. 공부벌레 같기도 하고 어리숙한 듯 보이기도 하고. 갑자기 엄마가 또 장난스럽게 물었다.
“ 네가 보기엔 어떠니? 이모부감으로 괜찮은 거 같아?”
(생각해보니 엄마는 일종의 상견례에 가까운 그 자리의 어색한 분위기를 좀 풀어볼 요량으로 나를 부른 게 아닌가 싶다.)
끄덕.
난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리에 앉자마자, 그러니까 막내 이모부를 보자마자
(직감으로) 이모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막내 이모는 엄청 똑부러지고 생활력 강한 타입이라 결코 ‘아무나(?)’ 데려오지 않았을 거지만,, 그때는 이모의 이런 캐릭터도 잘 몰랐다.
아무튼
이모부는 첫눈에 ‘통과’되었다.
근데 그 짧은 순간에 무엇을 보고?
영화 <어바웃 타임> 주인공 팀과 메리가 결혼할 때 축사를 하던 아버지가 그랬다.
우린 모두 삶의 끝에 가선 비슷하다
우린 모두 늙고, 같은 얘기를 수십번씩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결혼은 다정한 사람과 해라
난 이성의 외모나 비전을 중시하지만(진짜임!)
아주 어릴 적부터 결혼할 남자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다정함”이라 믿고 있었으니, 이 정도면 어릴 때부터 보는 눈이 있었다고 할까 ㅎㅎ (그러고보면 젊은 날 막내 이모부의 이미지는 영화속 팀과 비슷했다. )
그런데 이 ‘다정함’이란 어떤 것일까,
무슨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척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느끼는 다정함의 정도 역시 다를 것이다.
어린 나에게 다정함은 어떤 뜻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흔히 말하는 사교성이나 친화력이 좋은 것을 의미하진 않았던 것 같다. 또 말 그대로 정이 아주 많은 사람을 떠올렸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다정함’은 단어 그 자체로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 팀 아버지의 말처럼 했던 얘기들을 반복하고 늙고, 약해지고, 실수하고, 다른 이의 힘을 빌려 기대야 할 때 그런 인간적인 한계나 결점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
느낌, 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이해심’에 가깝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며 결점 많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의 삶이 가진 여러가지 측면을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 말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아, 이 사람 다정하잖아’ 라고 느낀다. 물론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아무런 삶의 원칙 없이 “다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난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가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 그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종종 느낀다. 하지만 퇴사부터 인간관계나 영화평점까지 여러 얘기를 보면, 어떤 면에서 그는 칼 같은 면이 있는 냉정한 사람이다.(우리가 남이가? 를 싫어하는 다정한 사람, 정말 애정을 쏟고 책임져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거리가 명확한데 보편적 인류애를 지닌 다정한 사람^^)
삶의 끝에 가면 우린 다 비슷하다ㅡ
이 말이 참 와 닿았다.
응, 그렇지.
그러니 모두들 남들은 아무도 안궁금해 할 일상의 얘기,
시덥잖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눌수 있고, 주름이 늘어가고, 몸의 어딘가 아파지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서로 측은하게 봐주고, 또 기대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ㅡ 다정한 사람을,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오늘 퇴근길에 들은 방송에서 한 이혼 전문 변호사가 그랬다. 남편의 외도도 아니고, 폭력도 아니고 정말 아무 일 없는 듯 지내다 갑자기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그런데 다정한 남편들은 거의 그런 식의 이혼 통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에 마일리지처럼 쌓아놓은 다정함이 서운함이 생기거나 힘든 순간에 그 고비를 넘겨주나보다. 근데 그 다정함이 뭐 최수종씨, 션씨 같은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상대의 몸이나 마음이 안좋아보이면 신경을 써주고,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산책이나 갔다올래?”라고 할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면 충분한 거다.
문득,
다정함이 없는 사랑이 가능한가? 라는 생각을 했다. 음.. 불가능할 거 같다. 그러니 결혼은 나를,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란 얘기였나보다. 이성으로서의 설렘과 열정이 좀 사그라들어도 시간을 공유하며 친밀감을 쌓아온 인간에 대해 잔잔하고 은근한 애정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물론 이 쪽도 마찬가지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