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한다.
너무 익숙해진 습관이라 이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도 사실은 모두 선택이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할지, 저 주황색 신호에 악셀을 밟을지 급 브레이크를 밟을지.
그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한 시간, 하루, 일 년, 내 삶 전체가 만들어진다. '나' 라는 인간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 점심 메뉴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선택이지만, 조금 후회스런 선택을 한다고 해도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우린 모두 살면서 한번쯤 그런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소설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
아미르는 아프가니스탄의 부유하고 명망있는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사업가, 어머니는 대학교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은 아미르에게 근원적인 죄책감과 불안을 심어주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미르는 아버지 바바의 사랑을 갈구했다. 온 도시의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아버지, 용감하고 멋있는, 사내 중의 사내라 불리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비교하면 자신은 늘 작고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런 그의 옆에는 하산이라는 또래의 하인이 있다.
다리를 절어 마을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하인 알리의 아들이자, 그를 낳자마자 도망쳐버린 행실 나쁘기로 소문났던 어머니, 그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낮은 신분에, 태어날 때부터 삐뚤어진 입술까지. 어쩌면 하산은 타고난 조건만으로 보면 불운이란 불운은 모조리 모아놓은 것 같다.
아미르와 하산은 친구처럼 함께 자라고 놀았으나 둘 사이에는 명확한 신분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아미르는 주인님이었고, 하산은 하인이었으니까.
그런데 때때로, 아니 자주 아미르는 하산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겉으로 보면 아미르가 그를 질투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산은 아미르에게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똑똑했고, 불의에 맞서다 얻어맞을지언정 비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아미르를 시기하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아미르를 좋아했고, 따랐고, 충성을 맹세했다. 과한 충성심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을 주지만, 아미르를 향한 하산의 마음은 단순히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맹목적인 애정 같은 것이라 어딘지 감동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런 그의 인품은 아미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하산을 곁에 두기가 힘들었다.
좋은 신분과 부모를 제외하면 그가 하산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아미르는 어릴 적부터 그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하산이 충성스럽게 굴면 굴수록 더 미워졌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의 존재가 계속해서 자신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상기시키고, 아버지 바바가 가진 훌륭한 자질을 자신이 아니라 하산이 더 많이 가진 것 같다는 의심과 비교를 불러오고, 그에 비해 비겁하고 약한 자신을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린다는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드디어 아버지의 인정을 받게 된 아미르! (이 연날리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일종의 성인식 같은 것이고, 전략과 용기, 체력 등 종합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것이라 우승자는 그 해의 히어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행운의 날은
그가 지옥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은 날이기도 했다.
우승한 연은 반드시 되찾아와야 우승이 인정되었는데, 아미르의 연을 찾으러 갔던 하산이 불량한 아이들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산이 죽어도 연은 내놓을 수 없다며 버티다 얻어맞고 성폭행까지 당하는 모습을 아미르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그는 하산을 구하러 뛰어들지 못했다. 숨어서 하산이 자신을 위해 겪는 고통을 지켜만 본 것이 아미르의 인생을 바꾼 첫번째 선택이었다.
그날 이후 아미르는 하산을 보는 게 더 괴로워졌고, 그럴수록 그를 모욕하고 괴롭혔다. 차라리 맞대응이라도 하고 같이 싸우면 나으련만, 하산은 그에게 당해주기만 했다. “그렇게 해서 기분이 좀 나아지셨나요?”라며 온갖 모욕을 담담히 받아내는 하산에게서 그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아미르는 결국 생일선물로 받은 값비싼 시계와 돈을 하산의 침대에 숨겼다. 죄없는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 집에서 쫓아낸 것, 이것이 아미르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두 번째 선택이었다. 하산이 도둑질을 했다고 하는데도 알리와 하산 부자를 붙잡는 아버지 바바, 그에게 결연한 표정으로 여기서 더는 살수 없다며 떠나겠다는 알리와 하산, 이 모든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아미르는 누가 죄인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때 아미르는 하산과 알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에도 진실을 밝히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린 날 이후
아미르는 줄곧 자신을 미워하면서 살게 된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혼란스러워진 조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아미르와 바바. 아미르의 기억 속에서 하산은 희미해져 갔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지은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작가가 되었고,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름답고 깊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하산에 대한 이야기는 할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을 바꿀 또 한번의 선택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 아버지보다 자신을 더 이해해주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을 응원해준 아버지의 친구 칸 아저씨에게서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다시 만난 아미르에게 칸은 아프가니스탄으로 와서 하산의 아들을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자신과 아버지가 떠난 뒤 하산이 다시 돌아와 남은 집을 지켰고, 집을 뺏으려는 탈레반에 맞서다 하산과 그 아내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남은 하산의 아들을 탈레반이 데려갔다는 뒷 이야기까지.
끝까지 하산은 그답게 용감하고 성실하게 살다 갔으나, 아미르에겐 갚을 수 없는 빚을 안겨주었다. 칸은 하산의 아들을 구해달라고 아미르를 불렀지만, 아미르는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살아 돌아올수 있을지 장담할수 없다.
이제 겨우 아내와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한 그가 아닌가.
게다가 하산, 하산이라니!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어두운 기억이었다.
망설이는 그에게 칸은 이렇게 말한다.
“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
그 한 마디에 수십년간 빗장을 걸어두었던 아미르 속 어린 아미르가 무너졌고, 다시 깨어났다.
아아.. 그는 모든 것을, 아미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아미르는 다시 착해질 수 있을까?
늘 도망치던 어린 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평생 미워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하필 하산의 아들을 데려갔던 사람은 어린 시절 아미르와 하산을 괴롭히고, 아미르의 연을 뺏으려고 하산을 폭행한 나쁜 녀석이었으니, 긴 악연을 끝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아미르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는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는 고통 끝에 탈레반으로부터 하산의 아들을 구해냈다.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죽을만큼 얻어맞고 있을 때 그제서야 그는 편안함을 느꼈다. 오래 전 그날 이후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몇십년 전
그 뒷골목에서
그 때 하산과 같이 얻어맞았더라면
이렇게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을
긴 여정 끝에 그는 하산, 하나뿐인 이복동생의 아들과 연날리기를 하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된다.
알고보니,
어린 시절 아무런 흠결 하나 없이 완벽한 존재로, 늘 크게만 생각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도 결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만 남긴채 떠났던 하산의 어머니 또한 그리 나쁜 여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지만
사실은 실수와 후회, 속죄를 하는 인간이란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바가 자신의 아들임을 숨긴 채 하산을 돌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산의 친어머니 역시 긴 세월을 거쳐 하산에게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손자를 애틋하게 돌보다 갔으니. 칸 아저씨의 말처럼 그들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을 후회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적어도 자기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진 사람들이었다.
실수도 결점도 없는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
단지 그 잘못을 되돌리고 책임지려 노력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만이 남는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의 선택지이다.
우린 모두 다시 착해질 기회가 있다.
물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아미르가 죽을만큼 맞으면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 것처럼,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을 미워하면서 사는 고통이 더 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