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처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시작될 때, 이렇게 오래 갈지 몰랐다. 전력 차이든 뭐든 그런 거랑 관계없이 국제사회가 이 전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이렇게 금방 나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질지도 몰랐다. 초반 1년을 제외하고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리 실감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지금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관련된 뉴스를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심각하구나.. 빨리 끝나야할텐데.. 정도에서 그치고, 또 다른 기사를 클릭하는 나를 본다. 쉬는 시간에 잠깐 들여다보는 기사에는 단편적인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것이 전쟁이든 실업이든, 범죄사건이든.
그렇게 쏟아지는 정보, 뉴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야기도, 고유한 존재로서의 사람도 없다. 누군가의 이름과 사건 사고는 담겨 있지만, 그 사람의 삶은 담겨 있지 않아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뉴스'라는 매체가 가진 특징이자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반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제2차 세계대전과 거기에 참전했던 소련의 여군에 대한 이야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아, 전쟁이 이렇게 끔찍한 것이었구나. 눈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런 마음이구나, 심지어 적군이라 해도 인간이 인간을 해친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후에도 이런 고통 속에서 살고 있구나. 아마 반전 평화 교육을 해야 한다면,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면, 전쟁과 관련된 데이터나 뉴스 보다 훌륭한 영화나 이런 문학 작품을 활용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눈물 범벅이 될 거라는 점만 견딜 수 있다면_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제목 그대로 읽으면, 폭력적인 전쟁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냐고 누군가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읽어보면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에 담긴 인터뷰 대상이 전쟁 과정에서, 또 그 이후에도 전혀 부각되지 않았던 여군, 특히 소녀 병사들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이 책은 그냥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의 참상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매우 신기하다.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는데, 그게 단지 소설의 소재가 된 것이 아니라 책 전체를 구성하는 일종의 '기록 문학'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소설 쓰면 작가 입장에서는 너무 쉬운 것 아니야? 날로 먹는 거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잖아!!) 자신이 이야기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만 잘 듣고 기록하면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조금 읽은 뒤에는 이런 글쓰기가 훨씬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떻게 개개인을 인터뷰한 걸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지? 인터뷰 대상은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할텐데, 거기에는 어떤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주제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엮어낸다는 게 예사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 읽으면 이게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된다.
"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아님 적어도 오해를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성적인 것'은 여자만이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가, 괴테가 살던 시대였다면 특히 여성의 특징으로 여겨졌을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뿐. 인간이라면 남녀 모두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파우스트>보다도 이 소설을 읽고 그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들,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소녀 병사들은 전쟁을 하면서도 예쁘고 싶어서 앞머리를 말고, 새 속옷을 받으면 신이 나서 어쩔줄 몰랐다. 전쟁이 뭔지도 모른채 나이를 속여가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터로 달려가기도 했고, 결혼한 여자들은 최전방으로 남편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적군이어도 어린 아이나 다친 사람을 그냥 봐넘길 수가 없어서 상관의 명령을 어기기도 하고, 전투를 망칠 뻔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어찌 보면 철이 없고, 전쟁터가 어린애들 놀이터인가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 사람이 죽고 죽인다는 것이 무언인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그들이 받은 충격, 공포, 혼란은 더욱 실감이 난다. 소녀병사들은 독일군을 전멸하고 이기겠다는 마음을 품고 떠났지만, 전쟁터에서 마주친 현실은 그 하나의 마음만으로 계속할 수가 없다. 분노와 적의만큼이나 후회, 두려움, 동정심이 뒤섞인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전쟁통에도 자신이 타인을 완전히 미워하고 죽일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독일군을 만나면 똑같이 복수해줘야지! 하고 마음 먹었지만, 막상 포로로 잡히거나 병원에 실려와 헛소리를 하는 독일군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져 먹을 것과 물을 내주면서, 자기 안에 그런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을 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에게 여전히 선의가 남아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런 그녀들을 보며 '으이구 바보같이 여기서 그러면 어떡해!' 라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이야기에 같이 울고 웃으면서 그녀들이, 아니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그들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응원하는 나를 본다. 단편적인 뉴스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독일놈들은 모두 악마였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전장에서 만난 독일군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스스로 잘못된 판단을 했든 잘못된 정부에 등 떠밀렸든 간에 그들도 우리처럼 가족을 그리워하고,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고, 타인을 죽일 때 망설이는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여성이 러시아 병사에게 빵과 커피를 주고, 휴대전화를 빌려줘 엄마와 통화할 수 있게 해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남자는 스물이 갓 되었을까 하는 청년이었고, 커피를 건네주는 적국 여인의 손과 전화 속 어머니의 목소리에 울먹였다. 그 영상은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숫자와 하나의 장면으로만 전달되는 정보가 아니라,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사람의 이야기, 맥락이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