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 이사벨의 선택

서머싯 몸, <면도날>

by 햇볕 냄새
" 그러니까, 내가 시카고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랑 결혼하지 않겠단 뜻이야? "

이사벨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는 래리를 사랑했다. 물론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를 간절히 원했다. 래리 역시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극단까지 밀어붙여 마지막 카드를 내보이면 래리 역시 마음이 약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한번 해 보기로 했다.

" 그래, 래리. 그런 뜻이야. “
ㅡ 서머싯 몸, <면도날> 124쪽


여기 결혼을 약속한 젊은 남녀가 다투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증권사나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여 대도시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살기를 바란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 직전의 호황기였기에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가 그 물결을 타고 부와 높은 지위를 거머쥐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고 싶다며 당분간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적지만 상속받은 돈으로 검소하게 지낸다면 결혼생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냐고,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녀에게 알려줄 수 있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가 말하는 삶은 시시하다고, 파티에도 가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고, 친구들의 옷을 빌려 입기도 싫다고, 그가 말하는 삶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그리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를 위해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둘은 울고불고 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담백하게 헤어졌다.


여자의 이름은 이사벨, 남자의 이름은 래리, 둘은 서머싯 몸의 소설 <면도날>의 주인공이다. 단 한 장면의 대화만 봐도 이렇게나 서로 안맞는데, 어떻게 사귀고 결혼까지 약속했을까 싶겠지만.. 이사벨과 래리는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고, 전쟁을 겪기 전까지 래리는 평범한(이사벨의 표현대로라면) 청년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에 파일럿으로 참전했던 래리는 전쟁 중 자신을 대신해 친한 친구가 사망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방금 전까지 웃던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다면, 아마 누구라도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혼란스럽지 않을까. 그러나 이사벨로서는 남자친구가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불안했고 또 불만이었다. 그녀는 적당히 세속적이었던 데 반해 래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고,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생각했을 때 이사벨은 래리가 말한 삶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둘이 헤어지고, 이사벨은 그레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이사벨은 젊고 아름다웠고, 솔직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레이는 그녀를 좋아했으며 부잣집 아들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그레이를 (래리에 대한 마음처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을 위해 하는 것에 감사했다. 둘은 아이를 낳고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레이가 돈만 많을뿐 그다지 좋은 남편감이 아니었고, 이사벨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진정한 사랑과 마음을 따랐어야 했다는 식의 통속적인 스토리가 아니다. 그레이는 인격적으로도 훌륭했고, 이사벨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어쩌면 안정적인 결혼생활에는 래리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을지 몰랐다.)


여기까지는 젊은 연인의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갈등, 이별이라는 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사벨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래리가 있었다. 매일 그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래리가 나타나면 그녀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녀는 래리가 다른 여자와 만나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이 알기를, 즉 그가 자기 바운더리 내에서, 자신과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녀는 그레이와의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10년이 지나도 똑같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레이와 이혼할 마음도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래리에게 끌렸다. 래리는 성공이나 명예, 타인의 시선에 무관심했고, 남자도 반할 수밖에 없을 듯한 선한 미소를 가지고 늘 말 없이 웃었으며,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래리로,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하지만 나는 이사벨의 마음을 상상하며 이 책을 읽었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청년보다 현실적인 결혼과 자신의 본능이 이끄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더 흔한 일이라 감정이입도 쉽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 결과는 어땠을까?


작중 화자인 서머싯 몸은 이사벨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좋아한다. 그녀의 미모, 재치, 재미있는 대화, 자기 욕망에 대한 솔직함과 적당한 세속성까지ㅡ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따뜻하고 사랑이 충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간파한다. 적어도 그녀보다는 남편 그레이 쪽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훨씬 뛰어나다는 것도. 끝까지 래리를 소유하고 싶어했던 이사벨이 래리가 사랑했던 또 다른 여자를 파멸시킨 계략까지 모두 간파하고 있는 그는 이사벨의 욕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사벨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물을 뿐 그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이사벨은 그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래리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녀는 현실과 이상을 모두 손에 쥐고 싶은 욕심쟁이일뿐이었일까? 래리와 헤어지기로 한 뒤에 이사벨은 래리를 유혹해 임신했다는 말로 그를 시카고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막상 자기 집에 와서 술 한잔 더 하라고 가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러겠다는 래리의 순수한 눈을 본 그녀는 그 계획을 포기한다. 차마 그 눈을 보고 그럴 순 없었다는 거다. 이사벨이 완전히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냐고 하면 그렇지가 않다. 그녀는 대공황기에 파산한 남편을 격려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왔으며 엄마의 역할도 훌륭히 해냈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갖지 못한 래리였다.


래리 역시 자신이 이사벨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녀와의 약혼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결혼하고 싶었던 유일한 여자는 소피였다고 말한다. 그 순간 래리에게서 이사벨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다. 소피는 당시 기준으로 미인이라 할수도 없었고, 몸은 깡 말랐고, 이런저런 고난을 겪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져있었고, 종국에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까지 했다. 그러나 래리는 그 말라깽이 소녀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이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는 말로 그녀가 겉모습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음을 대신한다. (소피가 이사벨보다 덜 계산적이고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소피는 진흙탕속에 있었지만 진실하고 용감한 여자였다.)

그러고보면 당시엔 사랑이라 믿었으나

두 사람 모두 깊은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의 열정과 소유욕, 익숙함을 사랑과 혼동한 것인지도.


이사벨의 마음을 이해할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가진 세속적 욕망도, 래리에게 끌리지만 불안한 마음도. 하지만 소피를 계략에 빠뜨려 래리로부터 떼어놓으려 한 짓을 보면, 역시 그녀는 나쁜 여자다(게다가 그 결과로 소피는 죽게 된다.) 매력적이지만 진정한 사랑이나 따스함은 부족하다는 말이 맞다. 래리가 자신이 한때 이사벨을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사벨이 소피에게 한 짓을 제외하면 그녀를 그리 비난하고 싶지 않다. 결국 그녀도 래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안락한 삶이 중요했던 것이고, 그녀는 그 중 더 중요한 것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것은 래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했다면 적어도 래리는 포기했어야 했다. 중요한 것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이사벨은 욕심쟁이, 나쁜 여자가 맞다. 그녀에게는 이런 본성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그레이와의 삶이 행복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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