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요지, <황혼의 사무라이>
어떤 사람을 두고 '남자답다'라는 말을 쓰면 시대의 감성에 맞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황혼의 사무라이> 속 주인공 세이베이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이건 특별히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한 게 아니다. 그저 '아... 이 사람은 진짜 남자구나!'라고 마음 속 깊이 느껴버렸다. (물론 여자가 세이베이 같은 면모를 지녔대도 똑같이 반했겠지 ㅎㅎ)
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의 원제는 <해질녘의 세이베이>다. 번역된 제목이 쓸쓸한 황혼을 떠오르게 하는 멋이 있지만, 실은 하급 무사인 주인공 세이베이가 해질 무렵만 되면 동료들의 술 마시자는 꾐도 거부하고 칼같이 퇴근을 해서 집으로 가기 때문에 붙여진 극사실주의적인 제목이다(물론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가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제목이기도 할 것 같다.)^^
지금 쓰는 글은 지극한 팬심에 기반하여, 스토리와 관계없이 오직 이 남자 세이베이의 멋짐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런 고로 간략한 그의 서사를 먼저 소개하자면_
세이베이는 다 낡아 해진 옷을 기워 입고 다닐 만큼 가난한 하급 무사이다. 그에게는 그럭저럭 잘 사는 친구가 있고, 세이베이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의 여동생인 토모에를 좋아했지만 자신은 넘볼 수 없는 신분의 여자라 여겨 포기했다. (토모에도 세이베이를 좋아한 것이 틀림없지만) 둘은 각기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세이베이의 아내는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고, 토모에는 남편이란 작자가 술과 폭력 문제가 있어 영주에게 이혼을 요청한 뒤 친정으로 돌아온 상태이다.
자,
여기서부터 왜 말도 없고 특별히 뭘 하지도 않는 세이베이가 진짜 남자다! 라고 느낀 것인지, 어떻게 '멋짐'이라는 것이 대폭발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두구두구두구두구!!!!
#1 강하지만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사람
토모에가 이혼하겠다며 친정으로 짐을 싸서 와버리자, 그녀의 남편은 영주에게 이혼을 신청한 것이 자기 명예를 떨어뜨렸다며 결투를 신청해온다. 아니, 너무 사랑하니까 돌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데다가 사무라이 자존심을 내세우나? 그럴 거면 있을 때 잘 하지. 아무튼 그는 토모에를 내놓거나 그녀의 오빠와 결투를 하자고 하지만, 세이베이의 친구이자 토모에의 오빠는 싸움엔 소질이 없다. 만약 명예 때문에 결투에 응한다면 죽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허나 이 시대는 결투에 응하지 않는 것도 수치가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이베이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친구를 대신해 결투에 응한다. 요기서 멋짐 포인트는 결투에 응한 것 자체보다 상대는 진짜 칼로 덤비는데 이쪽은 목검으로 싸우는 것이다. 나 너보다 훨씬 잘 싸운다~ 라고 내세우려는 게 아니라, 가급적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인데, 한 칼 한다며 으스대던 토모에의 남편은 진검을 들고서도 금방 나가떨어져버린다. 즉, 세이베이는 엄청난 무술의 고수, 숨은 실력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실력이 있고 강한데도 자만하지도, 드러내지도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넘 따뜻해^^
#2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세이베이는 엄청 가난해서 영주를 만난 날 다 해어진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상관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집에 와서도 아프신 어머니를 돌보고, 두 딸들의 공부를 봐주고,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만드느라 늦은 밤까지 일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남들은 그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딸의 학업을 지지하고, 재혼하라는 친척 어른의 성화에 없는 살림에 애도 둘이나 되는데 또 아내를 맞아 고생시킬 수 없다며 거절한 뒤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간다. 이런 매순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세상에도 화내지 않는다.
핀잔을 주는 상관에게도, 재혼을 독촉하는 친척 어른에게도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고개를 숙이지만 전혀 굴종의 느낌이 없다. 조근조근 거절할 때도, 거절할 수 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때도 그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게 있다. (이런 게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힘이겠지)
정치적인 이유로 상대측 사무라이를 죽일 것을 요구하는 영주의 명령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는 그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영웅적이고 용감한 사람이라기보다 평범한 가장에 가까워보인다.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혁명적인 인물이 아니라, 주어진 지위와 역할에 충실하고 내 가족을 잘 건사하겠다는 소시민적 인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전 죽어도 못해요!"라면서 화를 내거나 저항하는 것보다 자신은 실력도 부족하고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며 조용히 거절해보지만, 결국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을 수용하는 세이베이가 훨씬 더 멋져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용한 뒤 최대한 상대를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하기까지 하심^^)
#3 자신의 진심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이 영화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은 최후의 결전에 나서는 세이베이가 무사로서 의복을 갖추기 위해 토모에에게 도와달라고 전갈을 보내고, 달려온 토모에가 그의 옷을 입혀주는 장면이다. 아무 말 없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토모에와의 재혼을 권하는 친구에게는 자신의 처지에 토모에를 아내로 맞아 고생시킬 수 없다며 진즉 거절했던 세이베이였다. 그러나 오늘이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순간 세이베이는 토모에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애정, 그리고 자신이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함께 해달라는 말까지. 아, 이때 정말이지 너무 멋졌음!!!
결국 세이베이는 최후의 결전에서 살아 돌아온다. 상대 무사의 아픔까지 이해하며 최대한 그를 죽이지 않고 싸움을 끝내려 노력했고, 그 자신 또한 살아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운 세이베이. 몹시 지쳤으나 누구보다 기쁜 표정으로 토모에의 품에 안긴 그는 정말 멋지고 행복한 사나이였다.
" 아버지는 딸들을 사랑했고,
아름다운 토모에 아줌마에게 사랑받으며,
그 삶은 짧았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했을 거다.
그런 아버지가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
영화의 끝, 이 이야기는 세이베이의 딸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이베이는 그토록 사랑했던 토모에와 결혼했지만 전쟁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는 그 기간 동안 그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다.
딸에게 저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버지라면, 그만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