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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건 오직 너 때문이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by 햇볕 냄새

스물 아홉,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대학원 석사 마지막 학기는 졸업 논문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차이(difference)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문득 문득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그 주제를 처음 발표했을 때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도 벅찰 때가 많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지도 교수님이 열심히 도와주셨다는 것, 그리고 가장 다행인 건 내가 그 주제를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게 가장 큰 동력이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어했다는 것.) 그 무렵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준 것이 있다면 하나는 스핏츠(Spitz)의 '사랑의 노래'이고, 또 하나는 헤세의 글이었다. 슬픈 일이 가득할 때 내게 오라는, 어제보다 내일보다 지금의 네가 사랑스럽다는 그 노랫말이 쿠사노 마사무네의 담백한 목소리, 가벼운 리듬과 어우러져 묘하게 기분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헤세.

나에게 주어진 여가 생활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조금 쉬고 싶을 때는 중앙도서관으로 도망쳐 서가를 구경하고, 논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법한 책을 한 권 읽다가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헤세의 책이었다. <페터 카멘친트>부터 <크눌프>,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등의 책을 읽으며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마 내가 많은 장르 중에서 유독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말없이 그런 인간적인 위안을 건네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주인공 좀 이상한데, 좀 찌질한데, 그래도 괜찮아.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면 이해가 되니까. 덕분에 나라는 인간의 부끄럽고 작아진 모습도 그럭저럭 껴안아줄 수 있게 되어서.

나는 작가의 과제가 자신의 독자에게 인생과 인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거나, 그가 전능하고 권위적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은 나에겐 매우 매혹적이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처럼 해를 끼치지는 않지. 그들은 심판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닐세.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크눌프와 같이 재능 있고 생명력 충만한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또한 내가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 연약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일세.

- 1954년 1월
에른스트 모르겐탈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헤세는 어떤 삶은 올바르고 또 다른 삶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누군가는 정상이고 또 다른 이는 비정상이라는 식의 선 긋기를 하지 말라고. 타인의 삶을 판단하지 말고 그저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해주었다. 나야말로 언제나 이것은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조금만 그 선을 벗어나면 낙오자, 실패자가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선 안에서 편안하게 안주하고 살기엔 또 내 안에는 언제나 자유와 진짜 나에 대한 갈망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허전하고 쓸쓸하고, 무언가를 찾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헤세의 이야기는 언제나 답답하고 짓눌려 있던 가슴이 조금 펴지도록 만들어주었다.


논문과 관련이 없는 소설을 읽겠다고 했지만, 헤세의 모든 이야기들은 내가 생각하던 주제와 긴밀하게 닿아 있었다. 늙고 병든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곱추인 이웃 청년을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똑같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페터,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천성대로 살아가는 방랑자 크눌프의 삶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노라고 말해주는 하느님, 긴 수행과 방황 끝에 인간이 지닌 욕망과 맹목적인 사랑, 탐욕까지도 사랑스럽게 볼 수 있게 된 싯다르타. 그 모든 이야기에는 이른바 '보편'이라 부르는 범주 바깥의 존재, 내 논문의 주제처럼 '차이'를 지닌 존재들도 그 자체로 사랑스럽게 봐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 믿는다. (덕분에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놀고 있다는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고, 도서관을 나올 때면 '그래, 정해진 길 같은 거, 정답 같은 건 없어.' 라며 내 안의 불안을 또 조금 덜어냈다.)



헤세의 많은 책 중에서도 나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특히 좋아했다. 평생 단 한권의 책을 읽어야만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때, <스토너>와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책이 바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다. 누군가는 그 책이 그 정도로 대단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평생 단 한 권으로 꼽힐만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주 의미가 큰 책이었다. 두 주인공이 지성(나르치스)과 사랑(골드문트)을 상징하는 인물이라서 옛날 버전의 책들은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는데, 서로 완전히 다른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이 나누는 우정이 참 깊고 아름다웠다. 기나긴 방랑 끝에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르치스 곁에서 죽음을 맞는 골드문트의 모습을, 둘의 그 마지막 대화를 잊을 수 없어서.. 언젠가 동생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에 나르치스는 "내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건 오직 너 때문이야."라고 이야기했다.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노라며, 자기 인생의 절반도 나르치스에게 잘 보이려 한 일이었다고. 자존심 강한 나르치스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 기대한 적이 없었다면서도, 이제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바로 그 순간에, 모두가 자신을 버려둔 그 순간에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나르치스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겠다 답한다.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사랑은 상대의 기쁨과 행복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온전히 내 기쁨이 될 수 있는가, 내 욕심을 버리고 상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가, 상대의 이면에 숨겨진 욕구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였는데, 질투심도 독점욕도 많은 내겐 그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를 계속 고민했고, 그럴 수 없다면 아주 슬프고 외로울 것 같았다. 근데 바로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 있어서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은 것만 같아 무척 안심했다. 그래서 그 구절을 동생에게 읽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네 덕분이야."


나를 그런 의심으로부터 해방시켜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꼭 행복해줘.


남들이 들으면 그런 말을 동생에게 한다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손발 오그라드는 멘트를 전혀 아무렇지 않게 했다. 진심으로.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의미가 깊다.) 우린 쌍둥이지만 성격이 많이 달랐고, 나는 어린 시절 나보다 활달하고 사교성 좋은 그녀를 질투하기도 했었고, 그러면서도 세상 누구보다 그 애를 좋아했다. 유전자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동생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나에 대해서만큼은 꽤 통찰력이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읽어줘도 "언니, 왜 그래? 오글거려"가 아니라, "나도 그래"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 책은 누군가의 인생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는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누구나 나르치스의 삶이 더 낫다고 볼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수도원장이 되었고,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반듯한 인생인 반면, 골드문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엄청난 방랑과 방탕한 삶을 살다 죽음 직전에 돌아왔으니. 그러나 죽음을 앞둔 골드문트에게 한 나르치스의 고백은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지만, 특히 나르치스의 삶은 골드문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다(아마 마지막 순간에 무척 공허했겠지..). 나르치스는 잘 짜여진 질서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의로움을 추구하며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친구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느님의 관점에서도 자신의 삶이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인가? 모범적인 삶의 질서, 규율, 세속적 욕망과 쾌락을 단념하고 더럽고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며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삶이 과연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을까? 적어도 그는 골드문트로 인해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 얼룩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결코 왜소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자기 속에 깃든 성스러움을 죽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끔찍한 일들 속에서도 그는 친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골드문트,
직작에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당시 대주교님의 관할 도시에서 감옥으로 자네를 찾아갔을 때나 아니면 자네의 첫 작품들을 보게 되었을 때 혹은 언제라도 말했어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자네를 얼마나 좋아하며, 자네가 늘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자네가 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지 털어놓아야겠네. 이런 이야기가 자네한테는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익숙해 있고, 자네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진귀한 게 아닐 테니까. 자네는 그토록 많은 여성들한테 귀찮을 정도로 사랑을 받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사랑이 빈곤하고, 나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랑일세. 언젠가 다니엘 수도원장님께서 내가 오만해 보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 그 분 말씀이 맞겠지. 물론 내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지는 않아. 사람들한테 공정하고 인내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사람들을 사랑한 적은 없어. 수도원에 선생님이 두 분 계시면 나는 학식이 더 높은 분이 좋았지. 가령 약점이 있는 선생님을 바로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는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 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일세.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임홍배 옮김, 민음사, 469-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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