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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Jun 25. 2021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책을 소리내어 읽고 싶었던 이유

6년 전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았던 적이 있다.

그 동네는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시에 속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시골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카페나 편의 시설이 거의 없고 집 주변에 고추와 옥수수 같은 것을 심어놓은 밭과 길목을 지키는 흰둥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곳에 살았던 2년 간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와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밤이 아주 빨리 찾아오는 느낌이어서 밖에 다니기가 조금 무서웠기 때문이다.


직장과 집의 거리가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퇴근 후의 시간은 무척 여유로웠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그런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람들이 놀자고 불러내기도 어려웠고, 새로운 일터에서는 나를 찾는 사람도, 야근을 할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때까지 써지지 않는 졸업 논문, 되지 않는 연애, 갑자기 알지도 못하던 곳으로 떨어진 발령 등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던 나는 외로웠을 그 시간이 조금은 다행스러웠고 고마웠다.


그 때 나의 저녁 시간을 함께 하던 친구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였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씨가 김중혁 작가, 이다혜 기자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휴대폰의 작은 구멍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정말 많이 웃었다. 어느 교수님이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상상만 해도 설레이는 일을 하고, 그렇게 설레이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는데, 나는 침대에 누워 책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설레였고, 해실해실 또 키득키득 웃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 이상형이 '책 많이 읽고 허허허 웃는 아재 개그하는 사람(= 이동진)'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던 코너는 이동진씨가 직접 책의 한 부분을 낭독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뭘 엄청나게 감정을 실어서 실감나게 읽어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담담한 목소리가 어떤 날은 나를 위로해주고, 또 어떤 날은 격려해주고, 또 남은 날에는 묘한 설렘을 주었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어느날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브레히트의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라는 시가 들려왔다. 감기에 걸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낯선 목소리였다. 나는 그 전에도 이 시를 알고 있었지만, 그 날 바로 그 순간에 이 시가 얼마나 엄청난 사랑의 고백인지를 느껴버렸다. 제목마저도 그 마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게 아닌가,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해 썼다니! 거기에는 이동진씨의 담담하고 낯선 목소리가 한 몫을 했다. 인쇄된 글자로 읽던 시를,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이 시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 날의 감기에 걸린 목소리가 떠오른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2014년 4월에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어준 날이다. 그 해, 그 달은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은 분노보다는 슬픔이 더 컸다. 내가 그럴진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렇게 커다란 슬픔 앞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뭔가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체가 오만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은 도처에 있지 않았을까. 그 날의 목소리도 그랬다. 카버의 이 아름다운 소설도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이 글을 읽어주던 이동진씨의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내가 글이나 시를 소리내어 읽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을 담아 소리내어 읽어주면 꼭 나 들으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도 네가 들었으면 하고 읽는 것이다. 언젠가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모두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한 사람만을 위해,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노래를 쓴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내가 글을 쓴다면 그것은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를 생각하며, 그가 알아주고, 그의 마음에 가 닿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의 마음에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모든 것은 다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책,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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