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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Jun 25. 2021

그냥 보고 싶어서...

내가 목적인 만남

나는 가끔 잠이 쉽게 오지 않으면 편지 상자를 꺼내 읽어본다. 고등학교때까지 받은 편지는 없어졌지만, 대학 이후 그러니까 군대에서 동기 남자애들이 보내준 편지들부터는 빼곡히 상자에 쌓여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 사이가 된 선배의 편지도 있었다. 이 사람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나 싶은 것도 있다. 이십대 초반 홀로 낯선 곳에 떨어진 친구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했던 것 같다. 어떤 편지에는 그냥 솔직히 외롭고 두렵다고 적혀 있었다.


나도 그랬다.

멀쩡히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도 한번도 보지 못한 선배에게 편지를 써 나의 고민과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정작 그가 제대하고 학교에서 마주쳤을 땐 왜 그런 짓을 했나 하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한번도 본적 없는,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주는 자유로움을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의 가정사며 오랜 고민을 모두 털어놓았을 때 한편으로는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도 새어나갈 일 없는 비밀을, 그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만 후련해지는 마음을 이렇게라도 내보일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본 적 없지만,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서부터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그 남학생이 잘 살고 있기를, 오늘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의 안부도 바래본다.




이런 저런 편지를 다시 꺼내 읽다 몇년 전 한 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눈에 띄었다.


학교생활하면서 문득 문득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늘 바빠 보여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친구들까지 동원해 문제집을 뒤져 질문할 만한 것을 찾아 그 핑계로라도 보러 오고 싶었다고. 단풍잎은 나중에 주려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주고 싶어 기다리지 못했다고.


" 왜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 보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냥 내가 보고 싶고, 생각나서 오는 게 훨씬 더 좋은데. "

" 아무 일이 없어도 선생님을 보러 와도 된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


그 아이의 말에 마음 한 구석이 시큰했다.

내가 보고 싶다는 오직 그 이유만 있는 게 가장 기쁘지 않나. 다른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다는 거, 오직 나만이 목적인 만남. 이 이상의 감동이 어디에 있겠어.



왜? 무슨 일이야?


대학때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전화를 받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꼭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전화를 하는 거냐고.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고 할 말이 없어진다고.

맞다, 그 친구 말이 전적으로 맞다.

한번이라도 전화를 받으며 내가 "어쩐 일이야?"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면(아마 여러번 있었겠지 ㅠㅠ), 정말로 미안하고, 나의 이 무심함을 용서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냥.. 그냥 왔어요.


그래서 그냥 생각나서 왔다는 말이 감동적인 것이다.

나도 교무실에 찾아온 학생들에게 의자에 앉아 몸을 반쯤만 돌린채 " 왜? 무슨 일이야? "라고 물었다. 상담할 것이나 질문할 것, 조퇴나 외출 허락이라도 받으러 온 것 아닌가? 어서 네 용건을 말해 보렴.

아...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냉담하고 무심한 사람이었는지.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싶어했다니.

" 그냥.. 그냥 선생님 생각나서 왔어요. "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아이가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지기도 했다. 주위의 선생님들은 모두 왜 애들을 울리냐고, 왜 선생님한테만 가면 애들이 우냐고 장난스레 놀리기도 했다.


제가 울린 거 아니거든요.

내가 겉보기에 멀쩡한 대학생이고 교사였던 것처럼, 이 아이들도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이고 똑똑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쓸쓸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나는 그랬다. 외롭고 슬펐던 순간이 많았는데, 티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다 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고 괜찮다고, 잘 될 거라고, 아니 잘 안되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순간에 보고 싶고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다면, 나는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남들 앞에서 힘들다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잘 못하는 나는 애들한테는 힘들고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다 보여주었다.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강해 보이는 선생님이 되려는 욕망은 없었다. 나는 그냥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최대 약점, 컴플렉스, 온갖 트라우마를 학생들에게 고백했다. 그 아이들은 가끔은 놀리고, 가끔은 진지하게 위로하면서 다 받아주었다. 나의 온갖 부족한 부분을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미처 마음을 전하지도 못한채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나도 뻔질나게 교실을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뭐 하고 있는지, 잘 있는지 궁금했고, 그냥 보고 싶었다. 동생은 언니네 반 애들은 피곤하겠다고 했는데(담임이 그렇게 수시로 교실에 오니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좋아할 리가 있겠어?), 피곤했을 게 틀림 없는데, 그래도 내가 자신들을 좋아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그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려 보였는데, 맨날 놀리고 장난질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속이 깊었다.


어른이 되고 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얼마전 만난 사람이 자기가 뭘 사달라고 온 게 아니라는 말을 미리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옛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면 다들 넌 뭐 팔러 온 거냐는 말을 한다며. 남들만 그런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변했다. 갑자기 연락이 오면 애가 왜 연락을 했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 옛날 선배 언니에게 " 언니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나를 만나요? 왜 그런 게 없으면 못 만나는 거에요? 목적이 없는 관계라는 건 안되는 거냐고요! "라고 따지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휴직 중인 요즘 동료 선생님에게서 "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났어. " 라며 문자가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밤중에 " 보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너무 늦게 해서 죄송해요. "라고 날아오던 제자의 문자도 그립다. 새벽에 담임 선생님이 보고 싶어지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가끔 우리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날 때가 있으니까.


인생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걸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과의 만남에는 그런 게 없는 것,

그냥 생각나고 보고싶은 것이 훨씬 좋고, 기쁘고, 고맙다.

오로지 나만이 목적인 그런 만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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