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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Apr 26. 2021

망한 그림은 없어요

그리고, 망해도 괜찮아요.

그림을 배워보겠다고 처음으로 화실에 들렀던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매끈했어야 하는데 삐뚤어진 선과 조금씩 튀어나온 펜 끝은 내 마음의 불안을 담고 있었다. 삐져나가지 않겠다고, 모델이 된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보겠다고 긴장할수록 이상하게 선은 자꾸만 어긋나갔다. 왜 내 손은 내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고, 분명 수평선이라고 그은 것 같은데 기울어져 있는 것이며, 사진을 올려놓고 똑같이 구도를 잡았는데도 결국 그림을 그릴 공간은 부족한 것일까. 대체 왜, 왜, 왜...


저... 망한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세상에 망한 그림은 없어요.


아무래도 이번엔 망한 것 같다고 말하는 내게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고, 세상에 망한 그림은 없다고 답했다. 글쎄... 그럴까. 선생님의 말은 으레 하는 위로처럼 들렸다. 취미로 하는 것인 데다 처음 하는 거니 그럴 수도 있다고 마음을 비웠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영...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 혼자 볼 그림인데, 망해도 뭐 어쩌겠냐는 체념의 마음으로 마무리를 했다. 선생님의 말은 나에게는 그다지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리기를 끝내고 다시 그림을 보았을 때는 망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아닌가, 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삐뚤어진 선, 애매한 색감,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어쩐지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멀리서 봐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만족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해."라고 떠들며 식구들에게 자랑도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나는 매번 또 망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엔 색을 너무 진하게 칠해서 도저히 회생 불가 상태라거나, 다음엔 나머지 그림을 그릴 공간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뭔가 배치를 잘못했다거나.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똑같이 말했다. 망한 그림은 없어요.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정말로 망한 거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사진과 똑같이 그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거기 있는 걸 다 그리려 할 필요도 없고,
같은 색을 칠하려 하지 않아도 돼요.


담고 싶은 대로 담고, 하기 싫은 부분은 내버려 두라는 것.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완성이라는 것도 딱히 없었다. 그냥 이 그림은 이 정도에서 더 손대기 싫다는 마음이 들면 그만둬도 된다는 이야기. 뭐지?? 선생님은 뭘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하라거나 그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첫날 화실의 문을 열었을 때 뛰쳐나왔던 길 고양이의 안부나 쉽게 합격되지 않는 운전면허 시험, 가끔씩 봐야 좋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오갔다. 그래서였을까. 잘해야겠다는, 망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나는 편안해지고 있었다.


소설가 김연수 씨가 그랬다. 처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글을 쓴다고. 식탁에 앉아 쓰는 소설을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 한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독자들에게 뭔가를 던져주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라고. 한없이 긁적이다 보면 그간 받았던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글을 쓰는 자신이 치유된다고. 그 순간 오직 '자신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 남는다고. 그래서인지 등단하고 직업 작가가 된 후 나만을 위해 쓰던 소설을 누군가 돈 내고 책을 구입하는 사람을 위해 써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한탄에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면 화가가 직업이 아닌 것은 다행 아닌가, 오직 나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나도 오롯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만이 남는 그런 순간이 오려나. 선생님의 말이 주는 약발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나 보다.   


내가 그림을 배우는 화실은 집에서 두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도 또 20분 이상을 걸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가고 싶어 매주 토요일을 기다린다. 정말 시간이 남고 할 일이 없으면 해오라는, 과제 아닌 과제도 열심히 해간다. 과제는 꼭 해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내게 선생님은 이곳은 학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여긴 학원이 아니라, 음... 화실. 그냥 그림을 그리는 곳이에요." 뭔가를 배우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는 처음이었다. 끝날 때마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가네요, 라는 말은 아쉬움이 담긴 진심이다. 열린 문 틈으로 고양이가 뛰쳐나오던 첫날, 나는 막연히 선생님과 이 곳을 좋아하게 될 거란 느낌이 들었다. 나의 보는 눈은 꽤 정확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망한 여배우 최유라(권나라 역)가 등장한다. 잘 나가는 감독 기훈(송새벽 역)에게 연기 못한다고 욕을 먹다가 트라우마가 생겨 결국 자신이 꺾여버린 그녀는 진짜 망한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연기 못한다고 그녀를 쥐 잡듯이 잡던, 천재 소리 듣던 감독 기훈도 망했다. 아주 쫄딱. 시간이 흘러 망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기훈에게 망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그가 잘 나가는 감독으로 살고 있는 것보다 같이 망해버린 것이 어쩐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쌤통이다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라는 기훈에게 망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좋았다고, 기훈이 사는 동네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망한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아서,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유라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 드라마 속의 인물들, 망한 전직 영화감독 기훈과 그의 가족, 친구들은 텔레비전 바깥에 있는 나 역시 안심시켜주었다. 아마 <나의 아저씨>를 본 사람들은 다 조금씩 안심하지 않았을까.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렇지 않은 거구나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 아마 우리 모두에게 그런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망한다는 것은 뭘까. 나는 왜 매번 내 그림이 망했다고 생각했을까. 고작 선 하나 삐뚤 하게 그렸다고? 선생님은 망한 그림은 없다는데, 그렇다면 망한 인생은 있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가 그랬다.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혹평하는 영화, 속칭 망한 영화에도 그 속에 다 진심이 담겨 있다고. 단지 그 진심을 통하지 못하게 만든 약한 재능이 있을 뿐이었다고(아, 이 말을 하는 그는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가.). 인생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망한 인생이라 부르는 것 속에도 진심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모두 다 알지 못하기에 망했다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는 것 아닐까. 내 그림은 가까이서 하나하나 뜯어보면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멀리서 하나의 전체로 보면 전혀 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망한 그림이 없는 것처럼 망한 인생도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남지만, 망한 것은 아니다. 이동진 씨처럼 망했다고 평가되는 것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보고 안타까워할 수 있다면, 인생의 그 쓸쓸함마저도 조금은 덜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망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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