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을 물리치게 만드는 사람

당신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

by 햇볕 냄새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마지막으로 던진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시는 처자를 내맡길 정도로 믿음이 가는 사람, 온 세상이 나를 버릴 때도 믿어주는 사람, 내 목숨보다 서로의 목숨을 더 아낄 사람, 죽음 앞에서도 그의 존재 하나로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을 가졌느냐고 묻는다. 너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느냐고 하나씩 물을 때마다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 그래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 걸 보니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나보다... 하고. 하지만 또 어떤 질문에는 아직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 아쉽기도 하다. 최근 엄청난 애정 고백을 줄줄이 해준 친구들이 있지만, 아직 나 대신 죽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마음을 받기엔 아직 나도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만약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대도, 나는 나 대신 죽겠다거나 나 없이는 못살겠다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기왕이면 둘이 살 방도를 찾고, 나 없이도 잘 살아갈 사람이 훨씬 좋다.)


이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언제나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싶은 욕망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훨씬 더 어마어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쁜 짓의 유혹 앞에서 그것을 싫어할 내 얼굴이 떠올라 그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 아... 얼마나 상대방을 좋아해야 이것이 가능할까?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알뜰한' 유혹이라는 말에서, 멈칫했다. 알뜰한 유혹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알뜰하다는 말에는 돈을 아껴쓴다는 것 외에 지극하게 정성을 들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뜰한 유혹이라는 것은 정말 안넘어가고는 못배길 정도로 지극한 유혹이란 뜻이군. 그런 유혹을 물리치게 만들 사람은 누구일까. 인생의 여러 순간에 이정표가 되어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샛길로 빠지지 않고 내 갈 길로 잘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내가 존경하는 버트란트 러셀의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조부모님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러셀... 물론 그는 어린 시절의 고독이 자신에게는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나이가 든 이후에나 깨닫게 된 것이지. 외로움에 빠져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어린 아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학 시절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았다. 우정이 그의 근원적인 고독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이 세상에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이라 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 어떤 순간에도 떠올릴 얼굴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인생은 충분히 뜨거웠을 거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크롬프턴이라는 친구에 대한 일화가 함석헌의 시와 꼭 들어맞는다. 그가 어떤 친구였는가 하면,


크롬프턴과 관계된 사건들이 거의 매일 떠오르곤 한다. 때로는 익살스런 모습이거나 때로는 야비함이나 위선을 혐오하는 찡그린 얼굴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따뜻하고 후덕한 정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내가 혹시 정직에서 벗어난 짓을 하고픈 유혹을 받더라도 그가 못마땅해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다. 그는 재치와 열정, 지혜, 냉소, 정다움, 고결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그 점에서는 그를 필적할 사람이 없다. 그 밖에도 강렬하고 변함없는 정까지 지니고 있었는데, 그 정이 훗날 분해되어 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흔들림 없는 닻이 되어 주었다.

- <인생은 뜨겁게> 버트란트 러셀 자서전,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88쪽


이 구절을 읽고 나는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얼른 편지를 썼다. 우리 선생님은 쿨하게 답장을 보내셨지만, 나는 나의 뜨거운 고백에 쿨하게 답하시는 그 모습까지도 좋아한다. 만약 내 제자가 나한테 그렇게 편지를 보냈으면 엄청 감동해서 호들갑을 떨었을 거 같은데^^ 나에게는 부족한 그런 한결같음과 담담함이 더 존경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인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서,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알고 계시고 또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썼다는 마지막 말까지_


나에게 선생님은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해주시기도 하지만, 그게 어떤 엄격함이나 존경할만한 진지한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삶의 태도와, 나를 잘 알고 이해해주실 거란 믿음 때문이라는 거. 내게는 내가 믿고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거나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 어떤 원칙이나 이성보다 더 크게 와 닿는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의 서문에서 부인에게 바친 글이 너무 감동적이라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또 어마어마한 꿈을 가졌는데, 거기에 러셀까지 덧붙여졌다^^


그렇게 살려면

아, 인생은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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