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Jul 26. 2022

[어딘글방] 말을 했다 _ 하하보라

그 순간을 기억한다. 저녁을 먹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나와는 너무 다른 생각을 조금은 뻐기는 태도로 이야기한다. 나는 갑자기 피곤하다. 평소라면 망설임없이 논박했겠지만 어쩐지 입을 다문다. 옆에 있던 춘이가 너 잘 만났다, 소매를 겉어붙이고 붙는다. 둘은 가열차게 논쟁한다. 정확히 그때부터다. 한시절 열렬한 싸움꾼이던 나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슬그머니 피하거나 외면한다. 남은 인생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하하깔깔 살기에도 모자란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격렬한 논란의 자리를 슬쩍 회피한다. 하하보라의 글을 읽으며 그것은 얼마나 비겁한 태도인가, 반추한다. 젊은 여성 기독교인 하하보라는 교회와 정면으로 맞장뜬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인다. 박종철의 죽음을 뉴스로 접한 그 날 50대의 아버지가 20대의 나에게 그랬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우리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밥상이 엎어지기 직전 나는 문을 때려부술듯 꽝 닫고 아버지의 집을 나왔다. 하하보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신의 딸이 벌이는 싸움, 승리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말을 했다


하하보라



나는 모태신앙을 가졌고 중등부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19살 때부터 교사를 했으니까 교사로는 벌써 9년 차이다. 처음에는 초등부 교사를 했다. 교사를 하면 교사모임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학습이 아주 잘 된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교사모임에 열심히 참석했다. 처음에는 문가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교사모임을 갔을 때는 처음 본 나에게 커피 타는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 자리는 토스트기도 놓여 있었다. 어른들은 옆에 있는 언니를 따라 커피를 타고 토스트도 구우라고 했다. 나는 내가 왜 저들을 위해 커피를 타야 하나 싶었다. 자기들도 손이 있는데 왜 나한테 그걸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토스트를 주로 구워먹으며 먹느라 바쁜 척을 했다. 그리고 커피 물 양에 대해 아주 여러 번 물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각자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20살이 되었다.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갔고 에브리타임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처음 페미니즘을 보았다. 나의 모든 상황을 명쾌하게 해석하는 페미니즘에 나는 곧바로 매료되었다. 

초등부에서 만난 한 어른은 나에게 ‘너는 여대를 가도 다른 애들과 달라서 참 다행이야.’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는 내게 여대 애들은 다 페미니스트가 되어 오는데 넌 아니잖아. 라는 말을 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생각한지 2-3년쯤 된 시점이었는데 나보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보여요? 라는 말을 하면서 반성을 하게 됐다. 페미니스트처럼 보인다는 말의 의미도 고민하게 됐다. 

초등부 교사 중에는 김민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초등부 방송팀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괜히 나한테 시비를 거는 편이었다. 친한 척을 하고 싶었던 같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상쾌한 마음으로 초등부 교사실을 들어갔다. 항상 먹던 것처럼 나는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를 찾아오더니 왜 자기에게 와서 인사를 하지 않느냐며 고집을 부렸다. 무슨 똥 같은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있어서 무작정 화를 낼 수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인사가 받고 싶었으면 찾아오시지 그랬냐고 했다. 계속 그는 억지를 부렸다. 그래서 나는 먹을 때는 개도 건들지 않는 것 아니라고 하며 밥을 먹게 가라고 했다. 그래도 가지 않았다.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어른들이 겨우 내보내야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이후에도 그의 시비는 계속 되었다. 나의 화냄이 그에게는 인식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하루는 그가 무서워하는 오빠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자꾸 이 사람이 나한테 시비를 걸고 있다고 뭐라고 좀 해달라고 했다. 그 오빠는 웃으면서 얘 왜 괴롭히느냐고 말을 했다. 그의 한 마디가 있은 후 김민규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나의 거절은 인식되지 않았으면서 단지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이 웃으면서 뱉은 한 마디에 행동이 변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교회는 창립주일마다 교회 생일파티를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여성을 대상으로 의전을 시켰다. 복장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구두에 흰색 블라우스, 정장 치마를 입어야 했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 모습은 내게 불편함을 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목소리를 냈다. 하기 싫다고. 굳이 여성 청년이어야 하냐고. 치마도 싫다고. 시킬 거면 바지를 입고 싶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치마가 더 정장스럽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몇 번 더 말하다가 살쪄서 지금 가지고 있는 치마를 못 입는다고 했다.

그 유사한 시점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원래 교회 갈 때는 화장을 했는데 해보지 않기로 했다. 안경을 써보기로 했다.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 때부터 내게 의전 요청은 들어오지 않았다. 탈코를 한 모습을 보고 초등부 어른들은 내게 “여자가 예쁜 것도 능력이야.”, “너무 갑자기 그러면 좀 그렇잖아. 갭이 너무 큰데. 그래도 적당히 꾸며야지.” 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예쁘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요.” 그들에겐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계속 꾸밈을 강요했다.

 나의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그 시점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서명을 교회 로비에서 받고 있었다. 같이 초등부를 하던 사람이 내게 서명했냐며, 너도 어서 가서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저걸 받는 교회가 문제라고 했다. 더 이상 난 초등부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는 여성학과에 지원했다. 내 목소리에 힘이 필요한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교회를 변화시키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여성학과에 붙은 나에게 어른들은 ‘목사님은 왜 사모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예배시간에 할까?’ 이런 걸로 연구해봐. ‘여성인데 여성을 연구해?’라는 웃음도 안 나오는 유머를 내게 뱉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 6년쯤 했으면 졸업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이제 중등부로 가야겠다. 

중등부로 옮겼다. 중등부는 그 사이 목사가 바뀌었다. 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배에서 혼전순결을 강조했다. 동성애에 대해 말을 했다. 거의 매주 했다. 나는 나의 분노를 매주 참느라고 혼이 났다. 하루는 그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당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혐오적인 언어인지, 당신 때문에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내용을 담아 아주 공손하게 보냈다.  그는 내게 교회 밖에서 한 번 보자고 했다. 대화를 나눴다. 그는 그래도 내게 조금은 조심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그것은 궤변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웃으며 당신이 설명한 것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래도 잘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그는 역시나 또 반복했다. 1년을 참았다. 오래 참았다. 그에게 나는 또 카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엄마에게 ‘하원이 주변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나 봐요. 문제가 심각해요.’라고 했다. 그의 말에 엄마는 ‘그럴 수도 있죠.’라고 답했다. 그는 그 말이 오히려 화가 난 듯했다. 다음 예배 때 오병이어의 말씀을 나눠야 했는데 이와 상관없는 동성애 이야기를 꽤 길게 했다. 나에게 하는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 말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하다 나는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강대상이 얼마나 억압적인 공간임을 다시금 느꼈다. 나는 이전에 젠더 스펙트럼에 대해 그에게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제나 동성애만 이야기할 뿐이다. 언어가 참 짧다고 여겼다. 목사들이  세상 논리를 이기려면 세상의 말을 열심히 배워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루는 한 중등부 교사가 내게 무슨 전공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여성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난감해 했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가 우리엄마에게 아주 진지하고 걱정되는 표정과 말투로 ‘하원이가 여성학을 한다는데, 페미니스트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맞아.’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우리 엄마 반응에 그는 오히려 당황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나는 엄마를 페미니스트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들 눈엔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겠다. 

목사가 바뀌었다. 이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리아가 예수를 가진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요셉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잘 참았다면서. 욕을 할 뻔 했다. 그리고 본인이 요즘 욕정에 미치나보다 싶었다. 나의 학생들이 차라리 잠을 자고 있길 바랐다. 다행히도 잘 자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있으라고 일부러 옆에 앉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하루는 부장 선생님이 내게 와서 학생들 옆에 앉아서 애들 졸지 않게 하라며 옆에 앉으라고 이야기했다. 속으로는 안 듣는 게 학생들에게 더 유익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말로는 학생들이 좀 더 편하게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도 내게 학생들 옆에 계속 앉으라고 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옆에 가 앉는 것으로 티를 내는 편이다. 

하루는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묻지마 살인 사건이며,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또 가해자의 과거 정신병력을 읊고 있었다. 또 그의 가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표현을 했다. 나와 동생은 너무 열이 받았고 내 동생은 손짓으로 말 끊으라는 표현을 했다. 대단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나와 동생은 무엇을 정정하고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그날 학생들에게 목사가 말한 것 중에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그의 말이 어떻게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지를 설명했다.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단식이 계속 되고 있다. 목사들은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학생들에게 동성애는 죄임을, 세상이 너무 타락했으며 너네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 목사들은 그걸 위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논리적이라고 여겨지지도 않는 성경구절을 따와서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한 번 더 이야기를 하면 고대 시대의 시민권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줘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설교가 끝난 뒤 다른 반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웃으며 게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학생은 혐오문법을 여기서 배워가는 것 같다. 목사들의 입에서는 끝까지 교회 내 성폭력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순결에 대한 강요가 여성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으로 이어지는 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우리 반 학생들에게 말했다. 교회 내 성폭력 문제는 매우 심각하며, 너네가 혹시라도 이미 겪었거나 이후에 겪게 되는 성폭력이 있다면 꼭 이야기 하라고 나는 언제나 너네의 지지자가 되어 줄 것이고 같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줄 거라고 이야기했다. 

같은 날 대예배에서 담임 목사가 ‘여자는 애를 낳아야해. 몸이 안 좋아도 낳아야 해. 사모님을 보니까 몸이 그렇게 안 좋았는데 애 셋을 낳으니까 좋아졌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말들이 듣기 싫어서 대예배를 가지 않는 편인데 이과생인 내 친구가 그날 이 말을 듣고 분기탱천해서 연락이 왔다. 임신이 얼마나 많은 영양소를 결핍시키는 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오늘 나는 한 세미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교회에서 버텨주며 교회에 계속 목소리를 내고 변화 시키는 힘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청년 공동체는 생각보다 페미니스트 집단을 찾기 어렵다. 그들은 소외되거나 목소리를 내다가 지치다 못해 떠난다. 그렇게 내 친구들은 한 명 빼고 다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도 묻힌다.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목소리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것도 평등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대화는 아닌 것 같아 고민이다. 

어쨌든 그렇게 들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그 소리에 지친 우리는 코딩된 기계처럼 그저 일요일에 눈을 뜨면 교회를 가고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 한 주간 잘 지내다 오라고 응원을 하며 헤어질 뿐이다. 가장 예배다운 시간은 저 시간인 것 같다. 






부천여성의전화 글방 | 글감. 싸움의 기술



하하보라 (유하원)


현재는 여성운동단체에서 반성폭력운동을 하고 있으며 작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주변 사람들과 교회 반성폭력운동을 시작해보고자 소모임을 꾸리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관점과 보라색, 레고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어딘글방] 죽지 않는 유성 _ 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