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잘못된 거잖아 내가 이상한 거야?
나에겐 아직 친하게 지내는 대학교 동기들이 여럿 있다.
우리는 스무 살 때 처음 만났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우리는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들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모두가 늘 함께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 중 누군가는 우리들과 함께였다. 부분집합과 같은 존재였다.
대학교 2학년이 되자 남자 동기들은 군대를 가버렸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다. 그래도 여자 동기들이 몇 명 있어서 많이 외롭지는 않았다.
내가 대학교 4학년이 되니까 그들이 다시 복학을 했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어울릴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갑자기 무리 중에 두 명이 사귄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다 황당하였다...
엥? 왜? 진짜로? 장난치지 마라.
여자는 꽤 예뻤다. 인기가 많았고 그녀의 곁에는 늘 남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연애를 오래 하지 못했다. 늘 남자가 끊이지 않았고, 도화살이라는 표현이 돌기도 했다. 나는 그 표현이 싫었다. 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실제로 꽤 친하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동기들 중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과였다. 그녀는 과안에서도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번 그녀의 남자친구가 나와 친한 과 오빠여서 연애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그 둘은 헤어졌다. 그러고 나서 나와 친했던 그 오빠는 나에게 '어떤 사람' 때문에 그 둘이 갈라서게 되었다고 했다. 설명을 듣다 보니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내가 헤어졌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그 오빠가 나인 것을 알고 일부러 말한 건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로 그 오빠를 만나지 않았다. 우린 꽤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 과 사람들에게서 그 친구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자신에게는 여자인 친구가 많이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와서 여자인 친구들을 만들어서 기쁘다고도 얘기했었다. 나는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 소문에 반박할 근거는 없었다. 그저 나는 듣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게 과장되진 않았을지도 몰라, 그래도 걔 꽤 착해, 정도의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도 그녀와 멀어졌다.
그녀가 동기들 안에서 연애를 시작한 것은 그 이후의, 어쩌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우리는 다들 놀랐지만, 그리고 나는 그들이 1년을 못 채우고 헤어질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실제로 동기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몇몇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연애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남자는 아직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생인 상태였고, 여자는 같은 대학교에서 석사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퍽 잘 어울렸다. 여자는 성격이 화끈하고 매력 있었고 남자는 차분하고 진중했다. 여자는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시시각각 변했지만 남자는 둔하고 무딘 성격이었다. 그들은 꽤나 자주 이러한 부분 때문에 부딪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랜 시간을 연애했던 것이다. 동기들끼리 모여서는 우리가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친구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동기들 모임에서 그 둘은 빠지게 되었다. 어쩌다 같이 만나더라도 남자는 금방 가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둘이 행복하다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었으니까.
어느 날 서울에서 다 같이 모인 날이 있었다.
그날 어찌 된 일인지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그녀가 자신에게 또 헤어지자고 했다고 했다. 이번엔 진짜 헤어지자고 했다고. 왠지 느낌이 안 좋다고.
같은 대학교에서 석사를 하던 그녀는 좋은 기회로 근처의 다른 대학교로 박사 과정을 하게 되었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녀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문제가 점차 수면 위로 올라와서일까? 그들은 꽤나 자주 부딪혔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다. 모든 데이트는 늘 그녀가 있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려했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그랬다. 그러다가 예전처럼 다시 만날 거라고, 3년이 짧은 시간이 아니라고,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너에게로 올 거라고 단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일 것이라고.
한 달이 지났을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6번도 넘게 차단을 당했다가 풀렸다고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는 말하지 못했고 그의 친구들이 그의 말을 대변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했고 그녀는 계속 차단과 연락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같은 대학원 과정에 있던 사람이었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남자가 돈을 다 줄 테니 미국으로 와달라고 해서 그 중간에 미국도 갔다 왔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달이 지났을까, 우리는 꽤 자주 만났다. 헤어진 이후로 그는 우리를 자주 불러냈다. 나는 멀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보지 못했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거의 매일을 만났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 남자는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한 번은 그녀를 만나러, 혼자 가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고 했다. 욕을 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만나기 전에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그저, 절대 행복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녀의 반응은 꽤 차가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동기들과 연락을 끊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헤어졌다는 것과 관계없이 그래도 그녀와의 연락을 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녀와 이미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그들에게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연락을 주고받고 싶어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오늘 오랜만에 동기들을 다시 만났다. 그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잘 지낸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하던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것도 꽤나 충격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내 동기에게 이런 일이 있었대, 하고 이야기했는데 엄마는 그저 '요즘에 바람피우는 사람 많아. 사귀는 사람 있어도 다른 사람이랑 사귈까 말까 재는 사람들도 많고 환승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리고 결혼한 사이 아니니까. 아니 사실은 결혼하고도 바람피우는 사람 많은데, 연애할 때는 그런 사람 진짜 많아. 너 친구가 그 남자가 엄청 좋았나 보지'라고 답했고 나는 꽤나 충격이었다. 그런 사람이 많다는 얘기에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엄마의 그런 시큰둥한 반응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근데 엄마의 반응은 마치, 그래도 된다는 듯한, 사람을 살면서 그럴 수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정도의 반응.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서 꽤나 당황스러웠다.
정말?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 이후로도 몇 번 엄마는 대화를 시도했지만 나는 화가 났다.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 거지?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고? 그게 맞는 거냐고. 남들 다 그렇게 살면 나도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고.
우리 아빠는 바람을 폈다. 그리고 엄마랑 아빠는 이혼을 했다.
내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아빠가 언제부터 바람을 폈는지는 모른다. 엄마는 직감적으로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다 알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어. 아빠가 어떤 날은 처음 보는 팬티를 입고 와. 운동하고 나서 샀다고 했어.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어. 어떤 날은 내가 주말에 밥 해놓고 불렀는데 나와보지도 않았어. 네가 대학에 간 이후로 아빠가 주말에 집에서 보낸 적이 없어. 항상 나갔어. 갈 곳이 있었던 거지. 우린 네가 집에 없으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어. 반년도 넘게. 그는 나에게 생활비도 주지 않았어. 나는 그냥 홀로 외로이 견뎌야 했어. 하지만 더는 할 수 없었어.' 엄마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유년 시절 내내 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오늘은 아빠가 화를 낼까? 오늘은 아빠가 집을 나갈까? 오늘은 아빠가 집에 돌아올까?' 좀 잠잠하다 싶으면 아빠는 보란 듯이 엄마에게 또 화를 냈다. 어쩔 때는 그게 몇 달일 때도 있었고 어쩔 때는 한 달, 어쩔 때는 일주일 간격. 정말 그런 날은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아빠는 엄마를 때린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에 있던 접시가 다 깨진 적도 있었고 비싼 티비가 바닥에 내동댕이 친 적도 보았다. 언니는 학창 시절 정말 많은 방황을 했다. 언니는 정말로 집을 뛰쳐나가곤 했다. 나는 그런 언니 때문에 엄마가 너무 아파하는 꼴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저런 식으로는 엄마 속을 썩이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래서 엄마가 원하는 착한 딸로 살았다. 그게 스무 살 때까지의 일이다.
스무 살이 지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집에서 먼 대학교를 갔다. 평일에는 집에 있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매 주말마다 집에 갔다. 그때는 그게 습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엄마를 돌보는 일이었다. 우리 엄마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매주 와서 엄마 얼굴을 봤다. 아빠 얼굴도 봤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집이 아닌 오피스텔로 데려갔다. '엄마 집 나왔어.' 그게 엄마의 첫마디였다. '이제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집에서 물건들도 다 챙겨 나왔어. 급하게 나오느라고 너 물건은 다 못 가지고 나왔는데 그래도 당장 쓸 것들은 있어. 엄마 아빠랑 이혼할 거야. 엄마가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넌 어때? 괜찮아?' 난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 지금 벌어졌을 뿐이야'
지금은 아빠와 그 여자가 살림을 차렸다. 그 여자는 이제는 시간이 흘렀으니 우리에게 당당히 그녀의 위치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아빠는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부르길 원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그 집에 가봤다. 아빠는 집에 있던 가구들을 몇 개 가져와서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정말 싫었다.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만큼 싫었다. 유럽 여행에 갔을 때 나는 돈이 다 떨어져서 아빠한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아빠는 자기가 돈이 없다고 하다가 갑자기 돈을 보냈다. 나는 너무 기뻐서 감사하다고 하자 그 여자가 보낸 돈이라고 했다. 정말 나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그 돈이 필요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얼마 안돼서, 나는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아빠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그 집에 가고 싶어 져서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집에 찾아갔다. 왜냐하면 그 집은 나의 집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고 현관 앞에서 아빠한테 문자를 했다. 지금 현관문 앞에 있다고.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집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그 여자는 나를 보고 놀라더니 '사장님, 갈게요.' 하면서 내가 쳐다보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그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내려가는 것까지 다 보고 집에 들어갔다. 집에 가서 누구냐고 물어보자 아빠는 청소해 주는 여자라고 했다. 나는 청소해 주는 여자가 집에 왔다 갔는데 집이 하나도 청소가 안되어 있다고 하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난 엄마에게 이것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너 친구들 중에도 바람 펴서 이혼한 애들 생길걸. 나중에 내 사위는 안 그러길 바랄 뿐이야.' 엄마는 그런 말을 했다. 갑자기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 과정을 꽤나 잘 이겨내고 있다고, 아니 이미 이겨냈다고, 아니 제발 이겨내 달라고, 그 몇 년간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었기 때문에 이제는 제발 그만하라고. 어쩌면 내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는 걸 건드린 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건가? 지난 몇 년간은 정말 그랬다. 살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할 말 안 할 말을 정말 정확하게 구분해서 얘기하곤 했다. 혹시라도 내가 말을 잘못하면 그날은 바로 엄마의 감당하지 못할 짜증과 화와 서러움과 눈물과 분노와 우울을 받아냈어야 했다. 그래도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역치가 낮아진 거지 그렇지, 내가 지금 너무 간이 커졌던 거지. 갑자기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이내 기분이 풀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무슨 반응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어본 사람이잖아.' '그냥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예전처럼 엄마가 자신을 놔버리지는 않는구나. 초조와 불안이 사라지면서 화가 났다.
'당연히 잘못됐지.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걔는 아마 그 일을 평생 후회할 거야'
'걔가 미국에 가서 잘 살 수도 있잖아.'
'그럼 잘 살 수도 있겠지. 그 남자가 진짜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 근데 잘 사는 거랑 평생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하는 거는 달라. 사람은 살면서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힘든 일들이 생겨. 그러면서 철이 드는 거야. 아마 그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고 싶을 거야. 되돌리고 싶을 거야.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지. 그래서 절대 그러지는 못할 거야. 너는 후회가 되는 순간이 없니?'
엄마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퍽 날카로웠다. 나는 후회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고, 엄마는 내가 만났던 남자들을 들먹였지만 나는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질 않았는데 그게 왜 후회냐고, 내가 만났던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면 그게 꼭 후회가 되는 거냐고, 그것도 다 인생의 경험이지'라고 대답했다.
아니. 전혀 아니다.
후회가 되는 순간이 있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그 순간을 다시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물론 바람은 피우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런 사람들을 정말 증오하기 때문에. 최대한 도덕성으로 보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고 왜 흔들리는 순간들이 없었겠는가. 나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큰 후회를 하기 전에 늘 그것을 돌이킬 수 있었기에. 그리고 다시는 그 잘못을 하지 않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나는 동기들 중 한 사람을 좋아한다. 오늘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를 좋아한다고 느낀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 친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우리는 여럿이 아니라 둘만 만나고 했다. 나는 걔를 불러내곤 했고 걔는 내가 부를 때마다 나왔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고, 멋진 곳이 생기면 놀러 갔고, 나는 그의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놀러 다녔으며, 그는 운전을 좋아한다며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나의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그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물론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자주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1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퍽 잘해주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만나는 시간은 늘 편안했다. 여럿이 모일 때면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연애 상담을 했다. 그는 진지하게 나의 고민들을 들어주었다. 남자친구가 생기거나 헤어지게 되면 나는 늘 그에게 연락했다. 그는 내 모든 연애사를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좀처럼 연애를 하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3년 전의 짧은 만남, 그리고 작년에도 짧은 만남, 그것이 다였다. 우리는 항상 그에게 연애를 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나도 그에게 그가 잘 어울릴 만한 여자를 늘 골라주곤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했을 때는 정말 우울했다. 그가 헤어졌다고 했을 때는 꽤나 기쁘기도 했다. 나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얘기했다. 그리고 주위 여자들에게 그와 만나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정말이지 그와 사귈 생각은 없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선을 잘 지켰다.
스무 살이었을 때, 내가 그와 친해지기 전에 나와 같이 방을 쓰던 언니는 나에게 그와 잘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아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유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고 무던하다. 사실 나의 헤어짐의 원인은 늘 만났던 사람이 예민하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난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끌린다. 그리고 나에게 표현해 주는, 그것도 많이 표현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이내 예민함에 지쳐 헤어짐을 표한다. 그것이 내 연애의 늘 문제였다. 그런 연애에 지쳐 난 연애를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내 마음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의 부모님도 나처럼 이혼했고, 그의 경제 상황은 넉넉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가 그가 자신의 가족사를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엄청난 용기였고 그 이후로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하는 것에 꽤나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그는 연애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결혼은 더 많이 두려워했다. 결혼에 실패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많이 있었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채워줄 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가 먼저 연락이 와서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친구를 부르자고 해서 셋이 만나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실망을 했다. 그래, 너는 늘 그대로구나. 내가 용기를 내지도 못하게 너는 항상 다른 사람을 우리의 만남에 초대하곤 했다. 우리의 관계는 절대 진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도 우리가 잘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나와의 연락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내 부족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너의 부족함도 너무 잘 보였다. 우리는 친구로서 잘 맞았지만 연인으로서는 서로 맞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나뿐만 아니라 항상 모두에게 친절했다. 너랑 나랑은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셋이서의 만남도 굉장히 즐거웠다. 우리는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지난 이야기들을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까 대학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더 놀다 가자, 하는데 다른 친구가 일정이 있다며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럼 둘이서라도 놀아, 영화 어때? 우리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얼떨결에 둘이 영화를 봤다. 그런데 그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그 후속편도 봤다. 하루에 영화를 두 편을 봤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너를 신경 썼다. 너는 참 친절했다. 나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해 줬고 음식을 챙겨줬으며 나의 짐을 맡아줬고 음료수 병을 따줬다. 그냥 너는 그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러운 듯이 행동했다. 나도 그저 고맙다는 표현으로 그것들에 대한 감정을 애써 지웠다. 영화를 보면서 나에게 팝콘이 있었다면, 그래서 우리의 손이 닿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너의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하다가도 이내 그렇게 되지 않음에 정말 감사했다. 우리는 둘 다 용기가 없었다. 현실을 마주할 용기.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인생을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가까워지려고 하면 너는 항상 나에게 거리를 둔다. 그리고 선을 지킨다. 나도 그 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전처럼 연락도, 자연스러운 만남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너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그간 너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 연애상대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너에게 내가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고,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있다. 만약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이것을 절대 꺼내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이 묻어둘 것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우리의 관계는 늘 그래왔었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얘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려나?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내가 용기 내지 않은 것을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까? 난 늘 친구를 잃을까 봐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엄마는 '여자들은 어리고 예쁘고 똑똑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앞으로의 인생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라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너랑 나랑은 딱 여기까지가 맞는 사이겠지. 우린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리고 서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감정들은 묻어둘 거야. 너는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지.
세상에 남사친 여사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가? 난 오랜 시간 동안 그 존재를 인정해 왔는데, 조금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리고 오랜 친구사이는 어느 한 사람의 짝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럼 그 짝사랑이 나란 말인가? 난 절대 인정할 수가 없다. 이것 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