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으로 부끄럽게도 10년 전쯤, 페이스북이 가진 미디어로서의 엄청난 파괴력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페이스북이 언제 망할지는 알 수 없고 언젠가는 페이스북 또한 망하겠지만, 그래도 페이스북이 망하는 속도보다는 올드 미디어가 망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것 같다”고.
2. 물론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간 여러 일을 하면서 올드 미디어가 쌓아온 레거시라는 게 얼마나 무섭고 단단한지를 깨달았고, 그에 비해 지난 몇 년간 서비스의 발전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페이스북을 보면서 페북이 더 빨리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특히 페이스북이 메타버스 시대를 열겠다며 회사 이름까지 ‘메타’로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메인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조차 제대로 개선 못 하는데.. 과연 이 회사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엉킬 메타버스를 잘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4. 물론 마크 저커버그는 아웃라이어라서 무슨 일을 만들어낼지는 알 수 없고, 10년 전 했던 생각이 틀렸던 것처럼 이 생각도 틀릴 가능성이 꽤 높겠지. 근데 그럼에도 10년 넘게 페이스북을 이용해온 유저로서 그들이 만들 메타가 그렇게 기대가 되지는 않더라.
5. 그게 AR이든, VR이든, XR이든, 솔직히 애플이 더 심리스하게 잘 만들 것 같기도 하고.
6. 그러다 최근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화재로 카카오의 서비스들이 버벅거리고, 심지어 일부 서비스들은 며칠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7. 그게 AI이든, 메타버스든, 웹3든, ‘테크가 세상을 바꾼다’는 실리콘밸리발 각종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결국 ‘유동성’과 ‘평화’라는 토대 위에서 쓰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8. 일어날 확률이 굉장히 낮은 아주 극단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국 본토에서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테크 관련한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9. 우리가 접하는 테크 관련한 아주 멋진 이야기들은 세상이 평화롭고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유동성이 있을 때 가능한 주장일 수 있다.
10. 실제로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냉전 이후, 지난 몇십 년간 인류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고 말하기도 하더라.
11. 그리고 최근 들어 금리 인상으로 자금이 마르면서 위기에 처한 스타트업이 많다며 이를 엄청난 위기라며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12. 그런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도, 성격이 까칠한 탓인지 몰라도.. 투자 자금이 말라 스타트업이 위기에 처하는 것 못지않게,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해서 화폐 가치가 무너졌을 때 벌어질 혼란들이 솔직히 더 무섭더라.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13. 데이터센터 화재에도 전 국민 서비스가 몇 시간이나 셧다운 되고, 그로 인한 후폭풍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지 않나.
14.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그게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건 시대와 평화에 꽤 큰 빚을 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동안 빅테크 기업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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