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on Feb 16. 2019

성장은 언제나 한순간에 오더라

본질이란 결국의 실존의 역습임을


1. 스무 살이 넘어 뒤늦게 스타크래프트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2. 그때 스타를 좋아했던 이유는 게임 한 판 한 판이, 당시 제가 마주하는 세상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뭐든 다 잘 하고 싶었고, 뭐든 다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게임이 벌어지면 뭐든 예측할 수 없었고, 세상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데로 되진 않았거든요.


3. 그러면서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저 스스로는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삶의 많은 부분들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4. 게임을 이기려면 본인의 실력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지만, 물량, 컨트롤, 운영 등 본인의 실력만 잘 쌓는다고 게임을 이기는 건 아니었습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항상 상대가 존재하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 만큼,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게임은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고요.


5. 그래서 게임 하나를 이기기 위해선 본인의 실력을 쌓아야 하지만, 상대방이 무얼하는 지, 지금 이 순간 상대방의 약점은 무엇인지를 빠르게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도 그걸 자신의 손으로 구현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그냥 입스타가 되죠. 이런 오묘함이 20살 그 나이에 좋았고, 어느새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그 20살의 순간들이 지금도 삶의 많은 부분에서 가끔씩 힘을 줍니다.


6. 그리고 스타를 하면서 배웠던 많은 것 중 요즘 들어 부쩍 제 삶을 맴도는 것은, '성장은 언제나 한순간에 온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장이라는 게 꾸준히 지속해서 조금조금씩 발전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 그 느낌 속에서도 꾸준히 버티며, 빌드를 반복하고, 루틴을 만들고, 그렇게 계속 게임을 하다 보면, 언젠가 어느 순간에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몸과 마음을 움직일 때, 그때 '조금은 발전했구나'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7. 비단 스타만이 아니었습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그랬고, 사람을 대하는 일도, 늘 허둥대고 실수하고 좌절하면서, 그 순간들이 쌓아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이런 거구나'가 느껴지더라고요.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살았습니다.


8. 그래서 저는 많은 경우, 스스로가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도 크게 좌절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걸 조금은 믿거든요. 그래서 매일매일 성장하지 않은 삶이, 그렇게 더딘 삶이 초라하고 부끄러울지언정, 또는 재미없을지언정, 그 지루한 하루를 버텨내는 것에 때때로 만족하고 뿌듯해합니다. 누군가는 정신승리라고 하겠지만.


9. 그리고 이런 생각 때문인지, 저는 무언가 빠르게 성장하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보면서 부럽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쌓아온 그 지루한 순간들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고 그게 궁금한 편입니다. 그런 흔적들을 발견하는 걸 좋아하고요. 그래서인지 저는 J-커브보다는 계단식 성장을 더 좋아합니다.


10. 물론 그런 이유나 지루한 과정 없이도 빠르게 성장하고, 매일매일 발전하는 사람을 보면서 또 부럽고 질투가 나긴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니까요.


11. 언젠가 교수님께서,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지금 다시 교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본질이라는 것은, 그 실존의 지루한 순간들이 쌓여서 도달하는 곳'이 아니냐고요. 아니, 지금은 되물어볼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렇게 믿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본질이란 결국 실존의 역습'이라고요.



+ 2019년 2월 16일에 쓴 글입니다



썸원 레터 구독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50103


작가의 이전글 인간의 가치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