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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on Jun 15. 2018

어쩌다 보니, 기자가 되었다

IT 기자는 저널리즘뿐 아니라, 인사이트를 요구받는다


1. 사실 글을 쓰는 직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 나는 언제나 보다는 숫자를 더 좋아했고, 점수도 수학이 훨씬 더 좋았다.


2. 그러다 나이가 들고, 세상이라는 공간에 점점 더 밀착할수록, 어떤 일을 하려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때부터 글 쓰는 사람들의 강연을 찾아다녔고, 조금씩 책을 읽었고, 틈틈이 글을 썼다.


3. 그렇게 틈틈이 쓴 글을 온라인에 올렸고, 그걸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 온 꿈이 있었고, 그 꿈은 언제나 내 안에서 찬란했으니까.  


4. 하지만 그 꿈은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고, 꿈은 꿈일 때 가장 찬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더 씁쓸한 건 꿈은 부서져 사라졌어도, 살아야 할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먹고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5. 다행히도 기회를 주는 곳이 있어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완벽하지 않은 나만큼이나, 세상도, 조직도 완벽하지 않아서, 퇴사와 이직을 반복했다.


6. 그 과정에서, 특히 한 명이 여러 업무를 해야 하는, 스타트업의 특수하지만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덧 글 쓰는 이런저런 일을 했고, 기본적으로는 콘텐츠와 연관된 일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과는 계속 인연이 닿았다.


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는 일로 먹고살겠다는 생각은 하진 않았다. 어찌보면 글이라는 건, 언어를 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고, 누가 글을 잘 쓰냐에 대한 평가도 굉장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삶을 그 주관성에 맡긴다는 건 굉장히 무모한 일이니까.


8. 특히 스스로가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는 계산적인 사람에겐, 이 리스크를 테이킹할 수 없는 위태로운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9. 그러나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글 쓰는 일보다,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그 관계들이, 더 위태로웠고 더 불확실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10. 그래서 짧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마음 한 편으로는 계속 궁금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지, 과연 글을 쓰는 것이 내가 먹고살아가는 데 과연 유익할 활동일지.


11. 더욱이 IT기자는 저널리즘만큼이나, 인사이트를 요구받는다. 그런데 인사이트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무엇이 인사이트인지, 인사이트는 어떻게 생기는지, 이런 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12. 그래서 삶은 언제나처럼 또다시 위태롭고, 지금도 골치가 아프다.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적인 부분은 있다.


13. 그건 인사이트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글을 잘 쓴다는 게 뭔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것.


14. 그리고 무언가를 기록함에 있어서, '나'라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 또한, 일정 부분 이 일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15. 흔히 사람들은 '기록'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현장이나 사람에 대해 기록한다는 건 그 순간 그 기록자에게 들리는 음성, 그 기록자에게 보이는 장면, 그 기록자가 느낀 그 순간의 공기 등 대부분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6. 그래서 같은 공간에 여러 사람을 모아놨다고 해도, 그 순간의 기록은 기록하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기록을 베끼지 않은 이상.


17.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를수록, 그 기록 또한 달라진다. 바꿔 말하면, 기록을 한다는 건, 어떤 순간이나 장면을, 본인의 시각(sight)으로 정리하고 서술하는 일이고, 그 기록들을 자신 삶 안에(in) 쌓아가는 일이다. 인사이트는 없을지라도 일 자체는 인사이트한 셈.


18. 그래서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내가 마주한 세상의 장면들을, 내가 만난 사람들을, '나'라는 사람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공표하고, 평가받는 일, 그런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도 있다면, 그러한 삶도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다.


19. 특히나 꿈이 없거나, 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을 한다는 건 꽤 괜찮은 대안일 수 있다. 내가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꿈이 없더라도, 자기가 살아온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는 일이니까.


20. 그런 의미에서라면 굳이 직업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무언가를 기록하는 삶을 산다는 건 그 자체도 나름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21. 이쯤 되니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는 그 지겨운 교수님의 가르침이 또다시 떠오른다. 어쩌면 본질에 다다르지 못해도, 기록한다는 건 적어도 내가 실존하는 순간들을 나로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또 한 번 교수님이 이겼다.


201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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