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을 내려놓은 날
운동복을 챙겨 왔지만 점심시간 맞이했던 나른한 봄 햇빛이 아른거렸다. 집 갈 때 읽으려고 챙겨둔 책이 기억났다. 다이어리를 두고 온 게 맘에 걸렸지만 회사 다이어리와 펜을 챙기고 운동복을 가방에서 꺼냈다.
퇴근 후 혼자 설렁설렁 거리를 돌아다니며 카페를 기웃거렸다. 뻔한 프랜차이즈는 싫었고 저 카페는 테이블이 낮았다. 그때 공기를 타고 비눗방울이 날아왔다. 화려한 음악과 조명이 비눗방울을 타고 하늘로 흩어졌다. 멋들어진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 성수 같은데' 6시 이후의 성수는 이런 모습이구나 카메라에 저녁을 잠시 담았다.
카페를 방황하다 창문 너머의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이 보였다. 커다란 문을 밀고 들어가니 큰 볼륨으로 노래가 빵빵 공간을 울렸다. 안쪽엔 넓은 테이블의 좌석이 적당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놓여있었다. '여기다' 가방을 내려두고 카운터로 향했다. 디카페인, 티, 딸기라테 등 여러 음료를 눈여겨보다 BEER에서 눈이 멈췄다.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쌉싸름한 흑맥주가 보글보글 고운 갈색 거품을 담고 내게로 왔다.
회사 다이어리 중간즈음 펼쳐 챙겨 온 펜으로 조그맣게 마음을 써 내려갔다.
이 일을 하는 한 나는 노동소득만으로는 절대 부의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업계에 있는 한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인정하니 후련하고 조금은 씁쓸했다.
씁쓸함이 가신 자리엔 오랜만에 느낀 일렁거림이 있었다. 머릿속에 피어난 그를 글로 그렸다. 내가 관심 있었던 건 상대방 그 자체였을까, 그의 삶이었을까. 동경하는 삶을 사는 이에 대한 질투였을까, 호기심이었을까. 낮은 곳 숨겨진 마음을 찾아 문장을 헤집었다.
두 페이지를 빼곡 채우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있었다.
약간의 취기에 기분이 조금 들떴다.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고 사람들을 헤쳐 전철에 몸을 실었다. 퇴근 시간을 넘긴 전철은 한가했다.
그동안 나는 내 개인시간을 가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집했던 시간, 타이밍, 장소가 확실하게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동네 스타벅스, 모두가 잠든 밤의 내 방.
익숙하고 안락함이 주는 평온에서 그리는 나의 시간만이 정답이라 여겼다.
고집을 버리자 평온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의 반경이 늘어났다.
철저한 준비성, '반드시'를 버리자 여백에 마음을 새길 수 있었다.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