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추억쌓기 Nov 12. 2023

엄마로서 실패했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는 방법

내 아이의 장점, 사랑스러움에 집중하기

"아이에게서 엄마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실 수 있고 어느 정도 아이가 크고 나서는 시설을 고려해보셔야 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폐 진단을 받았다. 큰 딸아이가 워낙 순둥이라 둘째 아들도 그저 순둥이인가, 조금 늦된 아이인가 싶었는데 3살 말에 자폐 진단과 함께 의사가 해준 말로 인해 나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자책감,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가 자폐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자괴감 등에 빠져서 한없이 깊은 어둠으로 를 몰아세웠다. 자고 일어나면 눕거나 뛰거나 둘 중에 하나인 아이, 잠드는 것이 힘들어서 새벽까지 자신의 머리를 제 몸과 얼굴에 부딪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지쳐 잠드는 아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쳐서 피가 흘러도 멍이 들어서 퉁퉁 부어도 자신의 몸에 대한 인지가 부족해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 높이에 대한 인지가 없어 날이 덥다면서 14층 창문을 열고 에어컨 실외기에 올라서서 바람을 쐬는 아이, 워낙 순식간에 사라지고 순식간에 다치는 아이로 나와 남편의 삶은 물론 온 가족의 삶은 무너지고 갈수록 피폐해졌다. 


중증 자폐 진단을 받은 아이는 어린이집을 두 번이나 쫓겨났고 마지막 희망으로 특수아동을 잘 돌본다는 어린이집 상담을 갔었는데, 시설도 좋고 선생님들의 자부심도 마음에 들었고 오후엔 언어치료를 해주시는 선생님까지 오신다고 하니 정말 아이에게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나가면서 "저희 아이는 누워있는 걸 좋아하는데 저희 아이가 누워있을 때 수업이 시작하면 아이를 일으켜서 수업에 참여하게 하시나요?"를 물으며 당연히 발달장애아이들을 전문으로 케어해 주시는 어린이집이기에 알맞은 매뉴얼과 도움이 있을 거라 믿었기에 그럼요!라는 답변을 기대했는데, 선생님의 답변은 "CCTV가 목소리 없이 행동만을 녹화하기에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 아이를 강압적으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하고 아이가 쉬고 싶어 하면 쉬게 합니다"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어 상심하였다.


그럼 우리 아이는 24시간 누워만 있다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집 또한 안식처가 아니었기에 갈 곳 없이 그저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3살 자폐 소견을 준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거부하고, 그 이후로 옮긴 어린이집에서조차 아이를 거부하였고, 장애통합 시립 어린이집에서조차 마땅한 대안 없이 아이가 방치될게 뻔한 상황에 직면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잠조차 아이로 인해 해결되지 못하는 집은 나에게 지옥이었기에 내 삶은 죽음 아니면 아이를 포기해야 하는 건가..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죽음을 한걸음 뒤로 한 채 알게 된 선교원.


그때 일산에 계신 시누언니의 전화 "신갈에 엄마와 아이가 함께 다닐 수 있는 선교원에 있데" 이 한마디로 무작정 상담을 요청하여 교회 선교원의 전도사님을 만나러 갔다. 2월 말에 선교원 1층 카페에서 전도사님을 만나 상담을 진행하는데, 겨울과 봄 사이에 녹은 눈으로 카페 바닥이 진창인데도 더러움을 인지 못하고 카페 바닥에 눕는 아이로 저는 진땀을 흘려야 했었다. 전도사님께서 아이를 일으켜 세우면 눕고 또 일으켜 세우면 눕는 아이의 행동을 보시더니 "기도가 많이 필요하겠어요" 말씀하셨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다니게 해 주세요. 갈 데가 없습니다."  뿐이었다.


하지만 전도사님께서 주신다는 연락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아이의 상태를 봐도 나 같아도 전화하기 힘들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연락이 없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남편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된 토요일 저녁 남편에게 우스갯소리로 "전도사님께서 기도가 모자라셨나 봐"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울리는 벨 소리.


 "내일 일요일 교회 등록하시고 월요일부터 선교원으로 등원하세요." 


아이와 함께 선교원으로 9시에 등원하여 3시에 함께 하원하고 오후에는 센터를 다니고 돌아와 저녁을 하고 밤에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들을 보듬고 공부를 시키며 시작한 선교원 생활은 아이의 나이가 4살부터 초등학교 입학을 유예하여 8살까지 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선교원 어머님들과 전도사님께서 자폐 중증인 아이를 선교원에 받아들이실 건지 한 달간 함께 기도하며 어머님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하게 해 주셨다는 것과 전도사님께 상담을 간 시점이 신기하게도 전도사님이 칼비테 책을 읽으신 직후였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고 놀라웠다. 


칼비테는 자신의 아이를 영재로 키우기 위해 부모가 되기 전부터 예비하였지만 태어난 아이는 탯줄을 목에 걸고 나와 뇌의 기능이 많이 손상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비테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그동안 준비하였던 교육을 아이에게 가르쳤고 그 결과 칼비테 주니어는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 기준에는 버림을 받아도 마땅한 아이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교육을 시킨 칼비테. 그 책의 비전을 보고 진창바닥에 누운 아이를 받아주신 전도사님과 함께 기도하며 선교원 공동체 안으로 초대를 해주신 어머님들이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함께 기도하셨던 어머님들 중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아지가 깜깜한 닫힌 방에 있는데 그곳에 창문을 내어서 바람이 통하게 해주게 하라고 하셨다는 응답을 나에게 전해주시는데... 정말 힘이 들고 다 놓고 싶을 때도 그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닫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에게 참 큰 힘이 되었다. 나와 발달장애아인 아지의 닫힌 삶에 선교원은 창문이었고 시원하게 들어오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등원을 시작한 4월 수업 첫날부터 나에게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선교원 수업 중 다개국어를 배우며 다른 친구들이 영어, 중국어를 외우는 동안, 엄마와 함께 친구들이 재밌는 율동, 체조를 즐기는 동안, 그리고 맛있게 점심을 먹는 시간, 그 외 모든 수업 시간 내내 내가 했던 건 오로지 누워 있으려고 하는 아지를 의자에 앉히는 연습을 하는 게 전부였다. 교회에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고, 교회에 도움을 줄만한 지인이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선교원에 등원하는 엄마들도, 아이들도 가까이서 마주하는 자폐 아이는 처음이었기에, 자폐 아이의 엄마는 처음이었기에 나를 어떻게 대할지 그들도 몰랐었고, 나 또한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공기들이 흘렀었다.


특히나 비장애아이들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아지의 발달지연과 자폐 아이의 기괴하고 엉뚱하게 반복되는 상동 행동들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매일이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을 만큼 괴로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아지와 함께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목적과 이유 하나만을 잡고, 그전보다 더 열심히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고 또 달리며 나를 채찍질했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나의 밑바닥의 정점이면서 도약의 시작점이 되었다.


처음에 선교원에 등원하였을 때는 그저 밤에도 잠 못 드는 아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자리에서 점프하거나 앞으로 뛰어나가거나 누워있는 아이, 엄마가 옆에서 불러도 제 목소리를 인지 못하는 아이가 제발 앉을 때 앉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멈춰 서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한여름, 한겨울에도 검은색, 회색 반팔을 입고 아이와 등원해서 수업 시간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앉히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는 수업 시간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앉는 것이 되니 앞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앞을 보는 것이 되니 눈으로 지시한 사물을 또렷하게 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눈으로 목표한 사물을 쳐다보는 것이 되니 집중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고, 집중하는 시간만큼 상호작용이 되기 시작하더니 인지적인 것도 함께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지와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둘째 아이가 참 섬세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과 아지의 내면과 장점들, 무표정 속에 숨은 표정들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진정한 의미로 아이를 알게 되었고, 아이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아이를 진짜 사랑하게 되었고, 아이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아이를 태어난 순간부터 깊이 사랑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 돌 이전에는 그저 내 뱃속으로 낳아 키웠다는 막연한 모성애였다. 


그리고 자폐 진단 이후로 둘째 아이는 나와 가족들의 삶을 쥐고 흔들며 매일 무너짐을 경험하게 하고, 엄마로서, 한 사람으로서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을 갖게 하며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둘째와 함께 선교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아이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수록 깊게 사랑할 수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모성애가 싹트고 자라면서 열매를 맺어 아이가 내 삶의 기쁨이나 원동력이자 희망이 되었다.


그렇게 진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발달장애 아이의 인지가 느리지만 발달되는 것처럼 

엄마의 모성 또한 느리지만 발달될 수 있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