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예술, 영화의 역사(2)-최초의 영화 상영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
영화가 국제적으로 상업성을 가진
사업분야가 되도록 영사 시스템을 발명한 인물은
바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라고 불리는 루이(Lumière)와 오귀스트(Agust)였다.
뤼미에르 형제는 토마스 에디슨이 만든
개인관람 방식의 '키네토스코프' 카메라 이후에
더욱 저렴한 돈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든 새로운 카메라를 개발했다.
그것은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라고 불렸다.
시네마토그래프는 작은 카메라 겸 영사기였다.
이 카메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895년 3월에 촬영된
<공장 노동자의 퇴근(wokers leacing the
factory)>이었다.
이 영화는 3월 22일, 파리의 국가공업진흥위원회에서
열린 회담 때 대중에게 보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지정된 한 곳에서 돈을 지불하고 보는
현재의 극장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장노동자의 퇴근(wokers leacing the factory,1895)>
파리의 '그랑 카페(Le Grand Café Capucines)'에서 처음 상영한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
이후 1895년 12월 28일,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장소는 파리에 있는 '그랑 카페(Le Grand Café Capucines)'였다.
그 당시 카페는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가수들과 공연도 볼 수 있는 모임 장소였다.
Photo © Le Grand Café Capucines
영화의 탄생일이라고 불리는 12월 28일 저녁,
그랑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보기 위해 1프랑을 지불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영화'로 불리는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프랑스의 '시오타 역'에서 정거장으로
들어온 열차가 멈추고,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을
고정 앵글로 담은 아주 단순한 영화였다.
여기서 최초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1895)>
또한 <열차의 도착>은 현대적인 영화의
형태를 정립한 '최초의 영화'였다.
영사 시스템으로 많은 관객들 앞에서 영화를 상영한 점과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로로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은 영화관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영화의 등장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실제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은
관객들이 스크린 속의 열차가 객석으로
튀어나올 것이라 착각하여 매우 놀랐다고 한다.
당시 영화를 만든 투자자들과 기술자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빠르게 개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영화만의 표현방식을 개발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영화는 기록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카메라의 위치는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으며
카메라는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이동 촬영도 힘들었다.
또한 많은 돈과 기술력이 필요했다. 편집도 다채롭지 못했다. 편집을 많이 사용하면 관객들이 보기 힘들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초창기에는 영화라는 매체가 거대한 예술의 집합이 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 등장하는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 감독과
에드윈 S. 포터(Edwin Stanton Porter) 감독을 통해 영화는 새로운 발판에 놓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