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철학이 신문명의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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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욱은 '예술과 매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디지털 시대에 예술의 본질과 매체와의 관계를 깊이 탐구한다. 그의 통찰은 현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허욱은 디지털 기술이 예술 창작의 주요 도구가 되면서, 예술이 매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기술 발전이 매체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아트와 매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본다. 특히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이라는 개념이 디지털 아트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이며, 오히려 예술을 단순히 이름 짓는 '유명론(nominalism)'으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한다. 허욱의 관점에서 디지털 아트는 매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에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으며, 매체의 발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죽음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비극적인 진단을 내린다.
허욱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언급하며, 벤야민이 '아우라(aura)'의 소멸을 논하며 기계적 복제가 없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던 점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가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허욱은 벤야민의 강력한 기술 결정론적 관점이 오늘날 예술과 매체의 복합적인 관계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단순히 기술의 변화가 예술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선 심층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허욱은 현대 예술의 중요한 특징으로 매체에 대한 저항을 꼽는다. 예술은 매체 자체와 그것이 부과하는 한계에 끊임없이 대항하며 새로운 국면을 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예술은 우리의 감각을 증강시키고, 기존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드러낸다. 그는 이 새로운 현실이 항상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마네, 세잔, 뒤샹 같은 예술가들이 각자의 매체 한계에 도전하고 예술의 개념을 확장했던 사례들을 통해, 허욱은 이러한 저항의 역사를 조명한다. 특히 개념 미술이 예술을 아이디어로 파악하고, 이 아이디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기계'와 같다고 설명함으로써 디지털 아트와의 본질적인 연결고리를 제시한다.
허욱은 디지털을 이진 코드(0과 1)로만 이해하는 것이 피상적이라고 일갈하며, 디지털을 다양한 '추상화 수준(orders of magnitude)'에서 이해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이 선형적인 시간성을 파편화하고, 소리나 이미지를 미세한 단위로 분해하여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또한 알고리즘이 개념 미술의 아이디어처럼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실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이해가 디지털 아트와 개념 미술, 그리고 궁극적으로 디지털 아트와 매체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허욱은 디지털 아트가 매체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전시 '비물질(Les Immatériaux)'과 그 후속 구상인 '저항(Résistances)'을 언급한다. 그는 리오타르가 경고했듯이 오늘날 매체는 더욱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예술 활동과 금융 투기, 엔터테인먼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실을 비판한다.
허욱의 주장은 명확하다.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닫힌 것'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며, 매체 자체와 관습적인 사용이 부과하는 한계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은 매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체를 확장하고, 새로운 현실, 즉 '비합리적인 것(nonrational)'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비합리적인 것이 비이성적인 것(irrational)이나 이성적인 것(rational)과는 구별되며, 비록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정신적 경험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허욱에게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 가능하게(sensible) 만드는 행위이다. 그는 감각의 증강이 단순히 감각 기관의 확장이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현실, 즉 '열린 것(the open)'으로 우리를 이끄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허욱은 니체의 말을 인용, 과학을 예술의 관점, 더 나아가 삶의 관점으로 되돌려 창조성을 통해 매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허욱은 예술과 매체의 관계가 매체가 부과하는 한계와 도구성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속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매체의 도구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를 통해 정신의 물질화뿐만 아니라 물질의 정신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는 변증법적 통찰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