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욱과 맥루한: 저항과 수용의 사이에서

기술 철학이 신문명의 초석이다

by 소묘

왜 지금, 매체를 다시 물어야 하는가


디지털 기술은 우리 삶의 공기처럼 스며들어 예술과 매체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했다. 이 압도적인 기술 환경을 우리는 그저 수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그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 발전의 속도에 대한 반응을 넘어 인간의 감각, 사유, 그리고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해온 두 사상가가 있다. 현대 기술 철학의 중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허욱과 20세기 매체 이론의 선구자 마셜 맥루한이다. 두 사상가의 매체 철학을 비교하며, '매체는 과연 우리가 넘어설 수 있는 경계인가, 혹은 우리가 잠재된 채 살아가는 기반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의식을 탐구한다.


매체의 정의: 도구인가, 환경인가


맥루한에게 매체는 도구를 훨씬 웃도는 존재다. 그의 유명한 명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는 매체가 정보를 전달하는 내용보다 매체 자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이 인간의 감각과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환경'임을 역설한다. 인쇄술이 개인주의와 선형적 사고를 촉진했다. 전기가 '지구촌'이라는 새로운 감각 환경을 조성했다. 매체는 인간 감각의 외연이며,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를 규정하는 거대한 배경이라는 것이다.


허욱에게 매체란 감각의 도구이자 예술이 탄생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조건이 절대적인 속박이 아니라고 말한다. 허욱에게 매체는 저항과 재구성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다. 맥루한이 매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구조적 수용'의 대상으로 보았다. 허욱은 매체를 능동적으로 마주하고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실천적 저항'의 태도를 취한다.


기술결정론과 그에 대한 응답


맥루한은 매체가 인간의 인식 구조와 사회 변화를 선도한다고 보는 강한 기술 결정론자였다. 그는 인간이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환경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채 그 변화를 따라간다고 주장한다. 가령, 전기가 도시에 밤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24시간 활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 전기의 내용이 아니라 전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환경의 메시지라는 그의 비유는 이러한 시각을 충실히 반영한다.


반면 허욱은 이러한 결정론적 시각에 비판적이다. 그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론과 유사한 결정론적 관점을 비판한다. 기술은 분명 예술의 조건이 되지만 필연적인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기술이 예술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욱은 기술의 결정론적 힘에 맞서 '감각적 저항'을 통해 인간이 '이성에 지배 받지 않는 현실'로 접근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예술은 이 저항의 중요한 통로가 된다.


예술과 매체의 관계: 수용인가, 저항인가


맥루한에게 예술은 매체 환경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드러내는 '초기 감지 시스템'이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포착하여 작품으로 구현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다가올 미래의 변화를 예고하는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맥루한은 추상 미술이 인쇄술 시대의 선형적 시각에서 벗어나 전자 매체 시대의 총체적이고 비선형적인 감각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허욱에게 예술은 매체의 도식적이고 한정된 구조에 저항하며, 감각과 현실을 새롭게 여는 강력한 힘이다. 그는 마네가 원근법이라는 매체의 한계에 도전하고, 세잔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뒤샹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확장했듯이, 예술가들은 매체의 속박에 굴하지 않고 그 지평을 넓혀왔다고 설명한다. 디지털 아트를 둘러싼 논의에서 두 사상가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맥루한은 디지털이 새로운 매체 환경과 감각의 시대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허욱은 오히려 디지털 아트가 매체의 강력한 도구성에 포획되어 예술 본연의 저항적 힘을 잃을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허욱에게 디지털 아트는 '죽은 예술'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감각, 비합리성, 그리고 '열림'의 철학


허욱의 매체 철학은 니체와 리오타르로 이어지는 철학적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감각화'를 강조한다. 이는 시각적 재현을 넘어,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비이성적/초월적 감각 현실로 나아가는 예술의 영성적 차원을 지시한다. 허욱이 말하는 '이성에 지배 받지 않는 것'은 증명할 수 없지만, 정신적 경험에 필수적이며, 예술은 바로 이 영역을 '감각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감각을 '증강'시키고 '열린 것(the open)'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한편, 맥루한은 자신의 가톨릭적 배경 속에서 매체를 통한 인간 감각의 재구성을 강조한다. 그의 '지구촌' 개념은 전 세계가 전자 매체를 통해 상호 연결됨으로써 다시금 부족적이고 통합적인 감각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술적 현상을 넘어선 일종의 '영성적' 재결합으로 볼 여지가 있다. 허욱과 맥루한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각의 중요성을 논하며, 각자의 철학 속에 매체를 통한 독특한 감각 철학이자 영성론을 내포한다.


매체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


허욱은 "매체는 예술이 저항해야 할 조건"이라고 말한다. 즉 매체의 한계 속에서 예술의 능동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 맥루한은 "매체는 인간의 운명이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 저항"이라 말한다. 그에게 매체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기에, 그 본질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것이 곧 지혜이자 저항의 방식인 셈이다.


이들의 대립은 이론적 입장 차이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는 곧 기술 시대의 삶과 인간, 그리고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명적 태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허욱의 저항맥루한의 수용이라는 두 관점의 경계선이 교차한다. 매체는 공기처럼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다. 허욱과 맥루한의 통찰은 그 자명함 너머에 숨겨진 본질과 가능성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긴요한 것은 바로 그 경계 자체를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눈'이다. 매체가 인간을 규정한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열어갈지 절실히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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