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밴스의 사상적 스승, 패트릭 드닌의 보수 혁명 구상
2025년 초, 도널드 트럼프가 비연속 재집권에 성공하고 JD 밴스가 미국 부통령에 취임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비교적 젊고, 포스트리버럴 색채가 강한 밴스의 부상은 단순한 인사 변화를 넘어, 미국 정치의 새로운 시험대를 의미한다. 그 설계도의 이면에는 밴스의 사상적 스승이자 노터데임 정치철학 교수인 패트릭 드닌이 있다.
드닌은 『Why Liberalism Failed』로 이름을 알린 뒤, 신작 『Regime Change』에서 자유주의의 종언과 체제 전환을 선포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세습 귀족제를 폐지하고 개인의 기회 확장을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리 엘리트와 대중의 단층을 심화시켰다고 본다. 가정, 지역 공동체, 종교와 같은 형성적 제도가 해체되면서 대중은 불안정과 소외에 빠졌고, 엘리트는 글로벌 경쟁과 추상적 가치에 몰두하며 공유선의 조건을 약화시켰다.
『Regime Change』가 제시하는 해법은 세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혼합 정체. 엘리트와 대중을 제도 구성 단계에서부터 결합시켜 서로의 악덕을 견제하고 덕목을 함양하게 하는 구조다. 둘째, 아리스토포퓰리즘. 기술과 교양을 지닌 일부 엘리트가 대중의 생활세계와 결합해 정책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셋째, 공유선. 법과 질서, 문화적 연속성, 가족, 생계 기반 같은 공적 조건을 확대해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상태를 정치의 목표로 복원하는 것이다.
J.D. 밴스는 드닌의 이러한 구상을 정치 현장에서 번역하는 인물이다. 밴스는 상원의원 시절부터 산업정책, 노동 보호, 가족 지원, 이민 규제와 같은 의제를 결합시켜, 자유주의 우파와 진보주의가 놓친 대중의 생활 기반을 의제의 중심에 두었다. 트럼프 2기에서 그가 부통령직에 오르면서, 드닌이 말하는 체제 전환의 일부가 현실 정치에 투입될 조건이 형성됐다.
트럼프 2기의 정책 방향은 행정국가 개조, 규제 재편, 산업정책 강화, 안보·경제 연계 등에서 드닌의 설계도와 일정 부분 겹친다. 그러나 차이도 뚜렷하다. 드닌은 엘리트–대중의 제도적 결합을 통해 공유선을 실현하려 하지만, 트럼프 2기는 강한 행정부 중심의 집행력을 앞세운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밴스와 같은 인물들의 과제다.
『Regime Change』는 정치 질서를 재설계하는 매뉴얼이다. 제도의 외형을 보존하면서 내부를 공유선 중심의 규범과 인력으로 재편하는 방식이다. 트럼프 2기와 J.D. 밴스는 이 실험의 초기 조건을 갖췄다. 관건은 이 실험이 제도적 안정과 생활 기반 강화로 귀결될 수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엘리트 독점의 순환으로 되돌아갈지다.
미국 사회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가족 해체, 출생률 감소, "절망적 죽음"의 증가와 같은 현상들로 인해 쇠퇴하고 있다. 이는 자유주의 체제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는 경제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를 동시에 추구하며 소수(the few)와 다수(the many) 사이의 고대적인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토크빌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가들은 "혼합 체제(mixed regime)"를 통해 이 분열을 해소하려 했다. 이는 두 계층 간의 균형과 안정을 추구하여 모든 계층이 번영할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설계자들은 이러한 고전적 해결책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 과학"의 발전을 통해 계층 분열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 자유주의자들(고전적 자유주의자)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자유 시장을 통한 경제적 진보가 사회적 불만을 압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안정을 추구하기보다 "창조적 파괴"의 끊임없는 불안정성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의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진보를 통해 계층 화해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적 영역의 역동성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가족, 결혼, 성 정체성을 해체하고 인간을 본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회적, 기술적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는 모두 진보가 계층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정치적 평화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둘 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진보의 결과물을 유익하기보다 불안정하고 불쾌하게 여길 것을 우려했다. 이로 인해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진보의 축복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엘리트에게 정치적 통제권을 맡겨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자유주의 엘리트는 '소수'와 '다수'의 오랜 정치적 분열을 재현하면서도, 양 진영 모두 대중의 반발을 두려워했다.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을 "권위주의적", "반(反)전문가적"이라고 비난했고,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진보에 반대하는 모든 보수주의를 "인종차별적", "광신적", "파시스트적"이라고 낙인찍었다. 그 결과 "진보적" 경제 우파와 사회 좌파가 결합된 "워크 자본주의(Woke Capitalism)"가 등장했다. 이는 대중이 소비와 쾌락에 만족하며 진보의 축복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효과적이지 않다. 통제되지 않은 진보의 결과가 더는 대중에게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포퓰리즘의 반발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양쪽 모두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다. 이는 경제적 경계와 산업 보호, 사회 안전망 확대를 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진보에 반대하는 목소리로 나타났다.
자유주의가 내세운 해결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지배 엘리트들은 경제적·사회적 자유지상주의를 가속화하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인해 양 진영의 자유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포퓰리즘 대중이 부상하고 있다. '다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좌파 경제'와 '사회 보수주의'를 결합한 포퓰리스트로서 계급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실패가 명확해지면서, 진정한 자유주의의 반대자, 즉 진보 이데올로기의 추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 움직임은 고대의 전통에서 해결책을 찾고 현대적 용어로 재구성하려는 회복과 재창조의 프로젝트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 질서, 지속성, 그리고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대한 의무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보존하는 보수주의, 즉 공동선에 기반한 "혼합 헌법"을 통해 타락한 자유주의 지배계급을 평화롭게 전복시키는 "체제 전환(regime change)"이다.
오늘날의 "신(新)우파"는 이러한 대안의 가장 좋은 희망이다. 그들의 경제 정책은 과거 좌파의 사회 민주주의 전통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이는 보수주의가 본래의 모습인 자유주의에 대한 통합적 반대 세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진보 이데올로기를 전복함으로써 고대 사상가들이 제안했던 "균형, 안정, 장수"의 정치·사회 질서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공동선 보수주의(common-good conservatism)"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소수와 다수의 분열을 어떻게 심화시켰는지 추적하며, "혼합 헌법"이라는 고대 전통의 재발견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대중의 "지혜"와 "공동선"을 존중하는 공동선 보수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엘리트와 대중을 "혼합"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제안한다. 엘리트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태를 버리고, 대중의 정치적 힘과 결합하여 공동선을 위한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해야 한다. 이는 사회 전체의 번영을 위한 진정한 체제 전환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엘리트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계층이다. 이들은 자유주의의 정점으로서 나타난 결과물로, 특히 네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지배 계층들과 구별된다.
첫째, 이 엘리트는 '관리자' 계층이다. 상속된 지위나 재산 대신, 이들은 경제적 생산성과 기술 관료제를 결합한 유연한 기술을 소유한다. 이들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놓고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착된 삶을 사는 '관리받는' 대중의 핵심 가치에 반대한다.
둘째, 이 계층은 과거의 세습 귀족 제도에 반대하며 탄생했기 때문에, 계층 구조와 지위 상속 원칙에 맹렬히 반대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관리 기술 관료제라는 새로운 특성을 통해 그들의 지위는 빠르게 세습화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모순을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능숙하게 가리는데, 이는 자신들의 엘리트 지위를 평등주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동시에, 관리자 계층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희생시킨다.
셋째, 현대의 지배 계층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정체성 정치'와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무기 삼아 권력을 행사한다9. 이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지배 계층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의 전통적 신념과 관행을 억압하고 제거하려 한다. 예를 들어, '트리거 경고(trigger warnings)'나 '안전한 공간(safe spaces)' 같은 개념은 표면적으로는 보호를 위한 방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위 계층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는 자유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배 계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자유주의 '해악 원칙'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넷째, 이 엘리트들은 주로 정부나 공공 기관이 아닌, 대학, 기업, 언론, 할리우드와 같은 '사적' 또는 '준(準)사적' 기관을 통해 통제력을 행사한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관료제와 준 공공 기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선거와 같은 대중적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이러한 권력 행사는 '워크 자본(woke capital)'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지배 계층의 지위와 가치를 옹호하는 동시에, 자유주의의 원래 가치인 정부의 억압에 대한 불신을 비정부적 통제 방식으로 실현한다.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은 그의 저서 《매니저 혁명(The Managerial Revolution)》에서 이러한 '매니저 엘리트'의 등장을 예견했다. 그는 정보와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 정책 전문성, 추상적 사고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전통적인 산업 자본가들을 대체하여 부와 지위를 독점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새로운 엘리트들은 국가와 준 공공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생산 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아닌 통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세습 귀족 계층과 달리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획득했다고 믿으며,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은 결혼, 사교육, 인맥 등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하며, 부와 사회적 자본을 독점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겉으로는 평등주의를 외치며, 자신들의 지위가 정당하다고 믿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이 새로운 엘리트 계층은 과거의 귀족과는 달리 장소에 대한 유대감이나 세대 간의 연결성이 부재하다. 그들은 유동성을 중시하며 장소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전통적인 국경이나 문화적 제약을 거부한다. 이는 그들의 탈(脫)민족적 기술에 경제적 이점을 제공하며, 이민 정책과 같은 사안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이들은 과거의 전통이나 기억을 거부하고, 문화를 소비재로 재구성하며, 급변하는 유행에 의존하는 '밈(meme)' 문화를 창조한다.
이 엘리트 계층은 하위 계층과의 단절이 특징이다. 그들은 교육과 지리적 요인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도시 거주지를 '새로운 성채(citadels)'로 삼아 자신들의 '반(反)문화'를 공유하는 이들과만 교류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가리지만, 실제로는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고루하고 자격 미달이며 마음이 약한' 존재로 여기는 위선적 평등주의를 내세운다.
이들은 '다수'를 '소수'로 만드는 것이 분열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으며, '다양성 및 포용성(diversity and inclusion)'과 같은 구호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지위와 이점을 유지하려는 자기기만적 행위에 불과하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러한 현상이 엘리트의 '오만'과 대중의 '분노'라는 독성 혼합물을 만들어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 원칙'은 원래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 정치'와 결합하여 통제와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피해'에 대한 주관적 주장은 전통적 규범을 해체하는 데 사용되며, '진보'에 반대하는 이들을 낙인찍고 억압하는 데 동원된다. 이는 '비자유주의적 자유주의(illiberal liberalism)'라는 새로운 형태의 폭정을 낳았다.
기업들은 이제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이용해 문화적 변화를 강제하며,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진보적 자유주의가 결합된 '워크 자본주의'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있다. 인디애나주의 종교자유회복법(Religious Freedom Restoration Act) 사태는 이러한 권력의 비대칭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법은 다른 주에도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경제적 위협과 대중의 비난으로 인해 철회 압력을 받았다. 애플(Apple)이나 엘리 릴리(Eli Lilly) 같은 거대 기업들은 정당하게 제정된 법률을 무력화시키면서도 자신들이 약자를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위선을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폭정의 본질은 '진보'를 추구하는 엘리트 집단이 '다수'의 사회적, 문화적 억압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 폭정의 반대 세력은 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세계를 유연한 출발점이 아닌 대대로 물려받은 고향으로 인식하는 노동 계층에서 나타나고 있다. 해결책은 엘리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엘리트로 대체하고, 엘리트와 대중의 상호 발전을 통해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보수주의의 본질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보수주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입장처럼 보이며, 뚜렷한 철학이나 원칙을 가진 자유주의와는 달리 '분위기'나 '성향' 정도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공공장소에서의 종교적 표현을 보호하려 했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며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사적인 종교 활동을 방어하는 경향이 있다.
냉전 시대에 미국 보수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며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미국 예외주의, 진보, 세계화와 결합되며 사실상 진보적 철학이 되었다. 사회적 영역에서는 변화의 속도를 늦추려 했지만, 경제적 영역에서는 규제 없는 자유 시장을 지지하며 가족, 공동체와 같은 사회 제도의 안정을 훼손했다. 결국 이 '보수주의'는 경제적 영역의 가속화된 변화를 주장하면서도 사회적 영역의 변화는 더디게 만드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진정으로 어떤 것도 '보존'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보수주의'라는 명칭은 재정의될 필요가 생겼다. 이제 '보수주의'라는 이름은 자유주의 전체에 반대하며 서구의 '공동선' 정치 전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에 다시 부여될 수 있다. 이 전통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앞서 존재하며, 안정, 균형, 질서를 정치의 핵심 가치로 여겼다.
현대 정치의 세 가지 주요 진보 전통인 고전적 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는 모두 '변혁적 진보'라는 공통된 목표를 공유한다. 그러나 이들은 진보를 실현하는 수단에 따라 '소수'와 '다수' 중 어느 쪽이 진보를 가로막는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자유주의는 '다수'가 진보에 저항할 것이라 보았고, 마르크스주의는 '소수'가 진보의 적이라고 여겼다.
첫 번째 진보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현대 사상은 '변혁적 진보'가 인간의 행복과 만족을 실현하는 핵심 목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다수'가 경제적 진보를 방해하는 '혁명적' 세력이라고 보았다. 존 로크(John Locke)는 재산권 보호를 통해 '근면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엘리트들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경제 질서를 만들지만, 이는 '다수'의 불만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헌법적 제약을 통해 이들을 견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철학은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혁명적' 질서를 추구했다.
두 번째 진보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진보주의자들은 더 나은 자유주의가 사회를 도덕적 진보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개인주의를 비판했지만, 진보를 통해 계층 분열이 해소될 것이라는 믿음은 공유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수'가 경제적 진보가 아닌, 도덕적 진보를 가로막는 '보수적' 세력이라고 보았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다수'의 '관습적 폭정(despotism of Custom)'이 개인의 자유와 진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소수의 '창조적 비순응자'들이 사회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밀은 심지어 후진 사회에서는 '진보'를 위해 '계몽된' 외부 세력의 개입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세 번째 진보주의: 인민의 진보주의(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인민(the people)'이 진보의 주체이며, 이들이 엘리트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Engels)는 자본주의가 모든 전통적인 사회 관계를 해체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었지만, 이러한 혼란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탄생과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 계급이 '혁명적 열정'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혁명은 '전문 혁명가'라는 엘리트 집단이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또한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임시적이나마 엘리트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현대적 반(反)진보주의 대안: 공동선 보수주의
보수주의는 이 세 가지 진보 전통과 달리, '진보'를 정치의 주요 목적에서 배제한다. 보수주의는 지속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일시적인 희생을 정당화하는 현대적 믿음에 회의적이었다. 오늘날 공동선 보수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자유주의의 모순에 깊이 반대하지만, '다수'를 혁명적 세력이 아닌 안정, 전통, 공동체적 규범을 열망하는 '보수적' 세력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새로운' 보수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 시장과 진보적 자유주의의 사회적 자유지상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이는 국내 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고, 전통적인 결혼과 가족을 지지하며, 국가적 정체성과 문화를 옹호하는 등 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과거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의 '토리 민주주의', 그리고 크리스토퍼 라쉬(Lasch)의 저술에 뿌리를 둔다.
공동선 보수주의는 '좌파'의 경제적 평등과 공동체적 질서에 대한 약속과 '우파'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사회 가치를 결합하려 한다.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가 파편화시킨 것을 재결합하는 시도이다. 공동선 보수주의는 엘리트가 주도하는 진보에 대한 현대적 신념에 회의적이며, 그 대신 공동선과 공동체적 규범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 너머의 정치적 대안을 제시한다.
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공동선을 위해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고대 논쟁의 현대적 버전을 경험했다. 이는 지식과 전문성을 가진 소수(the knowledgeable few)의 통치와 다수 인민(the general mass of the people)의 '상식(common sense)' 사이의 오랜 대립이었다. 이 논쟁은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은 '철학자 왕(philosopher-king)'이라는 지식 엘리트의 통치를 옹호했다. 그는 정의가 오직 소수의 지혜로운 통치자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다수 대중은 무지하고 편협하여 이러한 통치를 방해할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에서 '전문가'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통치를 옹호하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에서는 과학 전문가들이 사회를 이끄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전문가 계층의 우월성을 정치적으로 구현한 사상이다. 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평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업적을 통해 지위를 획득하는 새로운 귀족 계층을 창출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가 경제적 자유를 방해할 수 있다고 의심하며, 그들을 수동적으로 만들려 했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행정 국가를 통해 전문가 계층의 통치를 강화하고자 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열정적인 정치적 논쟁보다는 전문가의 '기술적 해결책'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문성 우위의 사회 질서는 필연적으로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의 판단 역할을 축소시킨다. 존 듀이(John Dewey)는 교육이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 변화를 가속화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의 환경은 자연스럽게 '상식'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전문가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만든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민의 상식'이 가진 우월성을 옹호했다. 그는 전문성을 가진 소수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물을 사용하는 '다수'의 경험과 판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 건축가보다 그 집에서 사는 사람이 그 집의 장단점을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인민의 지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영역에서 힘을 얻는다. 첫째, 상식은 세대를 거쳐 축적된 전통적 지식의 거대한 보고(寶庫)이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급진적인 혁신을 거부하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인민의 '편견'을 옹호하며, 이를 통해 사회가 지닌 집단적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상식은 전문가의 편협한 지식과 달리, 다양한 현상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현대 대학들은 지식 '창조'를 우선시하며 전문화를 조장하지만, 이는 지식의 파편화를 낳고 통합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웨스틴 베리(Wendell Berry)는 전문화에 기반한 사회는 전체를 희생시키고 부분만을 다루려 한다고 비판하며, '응집력 있는 공동체'를 통해 분산된 지식들을 재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셋째, 상식은 안정성과 지속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전문성이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중요해지는 반면, 상식은 세대 간의 연속성과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빛을 발한다. 건국 초기에 반연방주의자(anti-federalists)들은 권력이 소수의 엘리트에게 집중되는 것을 우려하며, 소박하고 안정된 공동체 속에서 인민의 지혜와 덕성이 꽃필 수 있다고 믿었다.
'전문가'의 통치와 '인민의 상식' 사이의 논쟁은 결국 서로 다른 사회 질서에 대한 비전을 반영한다. 전자는 소수의 진보적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다수'의 지혜를 존중하며 안정과 연속성을 보존하려는 사회를 지향한다.
공동선 보수주의는 인민의 지혜를 중시하는 사회가 전문가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민의 덕성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필요하다. 인민의 지혜가 가진 덕성을 보존하고, 엘리트의 덕성이 인민을 지탱하는 사회. 이러한 상호 보완적인 관계는 '혼합 헌법(mixed constitution)'이라는 오래된 전통에서 영감을 얻는다.
보수적 질서에서 문화는 대개 아래로부터, 즉 지역적 환경과 축적된 경험, 그리고 인간 본성이 결합된 관습으로부터 형성된다. 이것은 '인민의 지혜'의 구체적 형태이며 권위적이면서도 민주적인 살아있는 유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에서도 엘리트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그들은 문화, 전통, 그리고 오랜 삶의 방식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기능한다. '혼합 헌법'은 바로 이러한 통찰에 기반하여 민주주의와 진정한 귀족주의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전 전통 속의 혼합 헌법
'혼합 헌법' 개념은 고대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두 가지 다른 해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주장한 '혼합-블렌딩'으로, 서로 다른 계급들이 완전히 섞여 새로운 '중산층'을 형성함으로써 정치적 온건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폴리비우스(Polybius)와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제시한 '혼합-균형'으로, 각 계급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되 서로의 힘을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단적인 부와 빈곤이 오만함과 굴종이라는 악덕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는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다수가 아닌, '중간' 계층이 지배하는 '정체(polity)'가 가장 안정적인 체제라고 주장했다. 이 중산층은 각 계급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피하며, 전체 시민의 신뢰와 공동선에 대한 관심을 함양한다.
반면 폴리비우스는 로마 공화국을 이상적인 혼합 헌법의 사례로 들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가 혼합되어 각 통치 형태의 힘이 다른 요소들에 의해 견제되고 균형을 이루는 체제였다. 그는 이러한 균형을 통해 정체가 부패와 전복의 순환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법률이 의도적인 이성적 심의를 통해 제정되지만, 공동체의 반복된 행위인 '관습(custom)' 또한 법의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통치자가 공동체의 좋은 관습을 용인함으로써 민주적인 자치와 엘리트의 통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덕스러운 혼합 체제를 묘사했다.
현대의 혼합 헌법
근대 혁명은 전통적인 문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반문화(anti-culture)'의 움직임이었으며, 이는 통치 엘리트의 의식적인 방어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엘리트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엘리트 의존성을 부정했지만, 보수주의는 소수와 다수의 연대가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영국 사회의 깊은 분열을 인식하고, 전통적인 귀족과 노동 계급이 연대하는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를 제안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경제적 개인주의와 급진적 사회주의를 결합하여 사회의 유기적 조직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는 소수의 엘리트가 '하나의 국가(one nation)'를 건설하기 위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라고 역설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법조인들이 가진 전통주의적 태도에 주목했다. 그는 법률가들이 질서와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혁명적 정신'을 견제하는 귀족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토크빌은 비록 '혼합 헌법'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엘리트가 대중과 공감하며 그들을 고양시키는 관계를 맺는 것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귀족 포퓰리즘 (Aristopopulism)
과거 반세기 동안 '보수주의'로 여겨졌던 것은 사실상 자유주의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선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새로운 보수주의는 대중의 포퓰리즘적 힘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엘리트의 연대, 즉 '귀족 포퓰리즘(aristopopulism)'을 통해 혼합 헌법을 재건하고자 한다.
이러한 체제 전환은 기존의 지배 엘리트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그들의 지위를 대중의 정치적 힘에 의해 제약받을 때 가능하다. 새로운 엘리트는 가족, 공동체, 좋은 일자리, 사회 안전망,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역할로 인식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엘리트'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고, 엘리트들 스스로도 이 명칭을 기피한다. 그러나 진정한 귀족(aristoi)은 그저 특권만을 향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인격과 능력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엘리트는 '능력주의'라는 미명 아래 특권을 세습하는 현재의 엘리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엘리트와 그들을 경멸하는 대중 사이의 끝나지 않는 '냉전'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인민의 불만 표출이 자유를 수호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듯, 포퓰리즘의 힘은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위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이 힘을 활용하여 '관리자 엘리트'의 독점을 깨고, 그들을 '공동선 보수주의'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해야 한다. 이는 엘리트와 인민이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블렌딩'되는 새로운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폭정은 결국 부패와 대내외적 반발의 조합으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지배 계층은 고전적 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폭정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맞서 아래로부터 시작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등장했다. 이 운동은 엘리트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혼합 헌법'이라는 대안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의도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진정한 '혼합 헌법'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현재의 엘리트들은 평등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지위를 감추는 능력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새로운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최고(aristoi)'임을 자각하고, 일반 대중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가치들을 수호해야 한다. 이러한 가치에는 가족, 공동체, 좋은 일자리, 사회 안전망, 기업 권력에 대한 규제, 질서와 연속성을 보존하는 문화, 종교적 신념과 제도가 포함된다.
흥미롭게도, '귀족(aristocrat)', '고위 인사(dignitary)', '고결함(nobility)'과 같은 단어들은 과거에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현재의 지배 계층은 자신들을 '엘리트'라고 부르는 것을 꺼리며, 대신 '중산층'이라 자처한다. 그들은 평등주의를 강조하며 '특권'과 '엘리트주의'의 흔적을 제거하려 하지만, 이는 그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치적 위장술은 엘리트와 대중 간의 오랜 갈등을 은폐한다. 엘리트들이 자신의 지위를 부정하는 동안, 사회 전체를 고양시키려는 노력도 사라진다. 존 애덤스(John Adams)는 특권층이 교육을 통해 하위 계층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늘날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성장에 발맞추지 못한 대중을 경멸하고, 그들 또한 엘리트들에게 똑같은 적대감을 느낀다.
포퓰리즘의 힘과 혼합 헌법의 재건
현재 미국에서는 경제적 및 문화적 자유지상주의에 반대하는 포퓰리즘 성향의 노동 계급 정당이 부상하고 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지지층은 자영업자, 건설 노동자, 트럭 운전사, 소상공인 등 전통적인 육체노동 종사자와 전업주부들이 많았다. 이들은 전문직에 종사하며 세계화된 경제 시스템의 수혜를 입은 조 바이든(Joe Biden)의 지지층과 명확히 구분된다. 이러한 재편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자유주의 양쪽에 모두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의 사회적 조건은 고대 '혼합 헌법'의 교훈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미국은 원래 '혼합 헌법'으로 설계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고 내전과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고전 정치 철학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인민이 압제에 저항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의 포퓰리즘이 기존의 엘리트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포퓰리즘은 사회의 근본적인 제도와 대중의 번영을 해치는 진보적 엘리트들의 계획에 맞서 싸워야 한다.
혼합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
'마키아벨리적 수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인민의 목소리, 지위, 위신, 자원을 증진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엘리트들이 대중의 가치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방안들을 고려할 수 있다.
하원 의원 수 확대: 조지 윌(George Will)은 하원 의원 수를 늘리면 선거구의 규모가 줄어들어 대표와 유권자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부유한 후원자나 미디어의 영향력이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방 기관 분산 배치: 워싱턴 D.C.에 집중된 연방 기관들을 지방 도시들로 분산 배치하여 엘리트들이 다양한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도록 해야 한다.
의무적 국민 봉사: 의무적 군 복무 제도를 부활시키거나 다른 형태의 국민 봉사를 도입하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봉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고등 교육 개혁: 엘리트 대학들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통해 진정한 사회경제적 다양성을 촉진하고, 학생들이 부담하는 부채에 대해 대학들이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독일의 교육 시스템처럼 대학 학위가 아닌 직업 교육(vocational education)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경제 독점 해체: 독점적인 경제 조직의 권력을 제한하고, 필수적인 의약품, 식량, 에너지 등은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의무화하여 국가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
사회 규범 강화: '워크 자본주의'에 의해 조장되는 개인의 쾌락주의와 일탈 행위를 비판하고,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를 지원하는 공공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기독교 정신의 부활: 대중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강조했던 기독교 정신을 재건하여 엘리트들이 자신의 특권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귀족 포퓰리즘'은 활력 넘치는 대중의 힘을 통해 새로운 엘리트가 탄생하고, 이 엘리트가 다시 대중의 삶과 번영을 위해 헌신하는 선순환을 목표로 한다. 이는 진정으로 '혼합'된 체제, 즉 '공화국'의 부흥을 위한 길이다.
'마키아벨리적 수단'을 통해 지배 계층의 독점을 타파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했듯이, 혼합 체제는 계층 간의 '견제와 균형'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블렌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합을 위해서는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분리(separation)를 극복하고, 더 깊고 포괄적인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분리의 문제 (The Problem of Disintegration)
프랑스 정치철학자 피에르 마낭(Pierre Manent)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이 바로 '분리의 조직화'라고 지적한다. 그는 자유주의 사회를 정의하는 여섯 가지 분리 요소를 제시한다. 첫째, 분업을 통한 직업의 분리. 둘째, 권력 분립. 셋째, 정교 분리. 넷째, 시민사회와 국가의 분리. 다섯째, 대표자와 피대표자의 분리. 여섯째, 사실과 가치의 분리, 즉 과학과 삶의 분리이다.
이러한 분리의 조직화는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동시에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진정한 통합은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다음은 '분리의 조직화'에 맞서는 통합의 길이다.
능력주의 극복 (Overcoming “Meritocracy”)
자유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분리는 성공자와 낙오자를 나누는 능력주의에서 비롯된다. 능력주의 사회는 성공을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간주하며, 실패자들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 전 하버드대 총장은 "불평등이 심화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마땅히 대우받아야 할 방식에 더 가깝게 대우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러한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추첨(lottery of the qualified)'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통합은 우리의 재능과 능력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재능은 개인의 영광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존 윈스럽(John Winthrop)의 '그리스도인 사랑의 모델'도 이와 같은 정신을 담고 있다. 그는 재능과 지위의 차이가 공동체 전체의 번영을 위한 상호 의무와 봉사의 기회라고 보았다.
인종주의 극복 (Combatting Racism)
인종 문제는 '분리'를 심화시키는 또 다른 요소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통합' 사회를 꿈꿨다. 이는 인종적 분리를 극복하고 능력주의적 평등을 추구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 그러나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은 이러한 이상이 서구 자유주의 질서에 내재된 인종주의를 은폐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백인성(whiteness)'을 모든 비백인, 여성,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시스템의 핵심으로 보고, 계층 문제보다 정체성 문제를 우선시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노동 계급을 인종적으로 분열시켜 엘리트 계층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이클 린드(Michael Lind)는 이민자와 원주민 노동 계급 간의 경쟁이 엘리트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지적했다. 인종 문제를 시스템적 문제로만 다루면, 이는 노동 계급 전체의 공통된 어려움을 은폐하고, 진정한 통합을 방해하게 된다.
진보를 넘어서 (Moving Beyond Progress)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는 과거, 현재, 미래를 분리하여 과거를 경멸하고, 현재에 불만을 가지며,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조장한다. 이는 사회적 연속성을 파괴한다. '지속성(continuity)'의 정치는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존중하고, 현재에 감사하며, 미래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을 경계한다.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는 이러한 진보 이데올로기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 데 무지하다고 비판하며, '노스탤지어'와 '진보적 낙관주의'를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국가의 재정립 (Situating the Nation)
민족주의는 본래 종교 전쟁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등장한 자유주의적 개념이었다. 국가는 내부적으로 종교와 문화를 통합하고, 외부적으로는 다른 국가와 분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는 더 이상 진보주의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진보주의자들은 '국가'를 '인류'로 대체하며, 국경을 초월한 세계주의를 추구한다.
진정한 통합은 지역 공동체, 국가, 그리고 국제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소속감과 의무를 배우고, 이를 국가와 인류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 '국제(international)'라는 단어는 국가들의 고유성을 인정하며 상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세계화(global)'는 이러한 고유성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종교의 통합 (Integrating Religion)
자유주의는 공적 영역에서 객관적 '선(good)'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인 무관심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종교'와 같은 질서를 탄생시켰다. '워크 이데올로기'는 공적 영역에서 객관적 선을 추구하는 모든 법과 관습을 제거하려 한다.
공동선 보수주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무너진 공동의 문화를 회복하고, 책임 있는 지배 계층이 공동선을 재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 다니엘루(Jean Daniélou) 신부는 정치가 '인간의 온전한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기도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 활동이 소수의 특권이 아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선 보수주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파편화를 초월하여 능력주의, 인종주의, 진보 이데올로기, 공적 무관심을 극복하는 통합을 추구한다. 이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폐허를 버리고, 우리 자신의 풍부한 전통과 살아있는 기억 속에서 공동선 보수주의라는 대안을 찾아 새로운 질서를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