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파시스트적 순간: 초월적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제3의 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

by 소묘


「Korea’s Fascist Moment: Liberation, War, and the Ideology of South Korean Authoritarianism, 1945–1979 (한국의 파시스트적 순간: 해방, 전쟁, 그리고 남한 권위주의의 이데올로기, 1945~1979)」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남한의 권위주의가 어떻게 민족주의 이념을 통해 대중의 동의를 얻었는지 분석하는 학술적 연구이다.


이 논문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사상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남한의 반공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논문 저자 및 배경


저자인 양성익(Sungik Yang)은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언어 및 문명학과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지도교수인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는 박정희 연구의 권위자로, 이 논문은 에커트 교수의 깊이 있는 학문적 통찰과 지도 아래 완성되었다. 양성익은 논문을 통해 한국의 권위주의를 억압과 통제로만 이해하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그는 권위주의 정권이 어떻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consent)를 이끌어냈는지에 주목한다.


핵심 문제 의식


초월적 민족주의의 존재: 해방 이후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초월적 민족주의’였다. 이는 공산주의와 서구 자유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민족 전체의 단결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상이다.


이데올로기의 파시즘적 성격: 초월적 민족주의는 혈통, 역사, 공동체를 강조하며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유사하다. 이 논문은 파시즘을 유럽의 특수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탈식민지 사회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 이데올로기 현상으로 확장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 국가는 학교 교육, 군대 정훈 교육, 언론 등을 동원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주입했다.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는 민족을 위협하는 ‘반민족적’ 존재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되며 민족주의의 핵심적인 부분이 된다.


「Korea’s Fascist Moment」은 한국 현대사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복잡한 기원과 현재적 과제를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1장 영구적인 위기 시대의 초월적 민족주의의 대두 (Perpetual Crisis after Liberation: The Rise of Transcendent Nationalism)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의 독립을 환호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해 깊은 위기감에 휩싸인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공간에 팽배한 다양한 담론을 낳았으며, 이념적 혼란과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초월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


해방 직후의 위기 상황과 담론의 다변성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은 곧바로 강대국 간의 이념 대립인 냉전의 최전선을 형성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세계 제3차 대전으로 이어져 한반도가 또다시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또한,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임시적인 분단이 영구화될 수 있다는 공포도 커져갔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좌우익의 이념 대립이 격화되어 정치인 암살과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국인들은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활발하게 논의했다. 미국식 민주주의, 소련식 공산주의, 그리고 한국 고유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특히,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뛰어넘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초월하려는 움직임


초월적 민족주의는 냉전의 이념 대립을 비판하며 민족적 정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사상이다. 1948년 박상길(朴相吉)이 출간한 「우주탄 선언」(Ujut'an sŏnŏn)은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인 예시로, 그는 공산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두 불완전한 '반쪽짜리 철학'으로 규정한다. 박상길은 이 두 이념을 통합하여 절대적인 민족적 단결을 이루어야만 한반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은 이승만, 김구 등 당대 주요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초월적 민족주의 담론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월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며 민족의 운명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러한 사상은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익 추구를 부추겨 사회적 분열을 심화하고, 공산주의가 계급 투쟁을 통해 민족적 통합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결국, 민족의 생존과 통일을 위해서는 개인과 계급의 이익을 초월한 민족적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초월적 민족주의와 파시즘의 유사성


초월적 민족주의는 민족적 정체성을 절대적 가치로 내세우고 개인의 희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럽과 일본의 파시즘 이념과 유사하다. 이 사상은 민족의 단결을 위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제3의 길을 주장하며, 이러한 초월적 성격은 냉전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얻었다. 초월적 민족주의는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밑바탕이 됐다.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직후부터 1960년까지의 시기는 정치적 혼란기만이 아니라, 초월적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이념이 형성되고 자리 잡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이념적 흐름은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초월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제도화되고 대중에게 확산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2장 국가 이데올로기 복합체의 탄생 (The Creation of the State Ideological Complex)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는 제주 4·3 사건과 여순 반란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국가는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국가 이데올로기 복합체'를 구축한다. 이 복합체는 학교, 군대, 언론 등 다양한 기구를 활용하여 초월적 민족주의 이념을 사회 전반에 주입했다.


이데올로기 복합체: 교육과 교과서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부는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민주주의 이념으로 계몽하려 했다. 하지만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 교육자들의 영향력이 컸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민족적 정체성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민족적 민주 교육’이나 ‘민주적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특히, 이승만 정부의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安浩相)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 단군 신화에 뿌리를 둔 홍익인간은 민족의 단결과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며, 개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반공(反共)을 윤리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다. 윤리 교육은 공산주의를 비윤리적이고 비민족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학생들에게 민족과 국가를 위한 희생을 주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데올로기 복합체: 군대와 언론


군대 역시 이데올로기 확산의 중요한 통로였다. 1949년 창설된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의무 가입을 규정하며 군사 훈련과 함께 반공 민족주의 이념 교육을 실시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정훈 교육(政訓敎育)’을 통해 모든 군인에게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 반공 정신을 주입했다. 이러한 교육은 군인들을 국가의 이념적 수호자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언론 또한 국가 이데올로기 복합체의 중요한 축이었다. 미 군정기부터 이승만 정부에 이르기까지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검열과 통제를 받으며 국가의 이념에 순응하도록 강요됐다. 정부는 「주보(週報)」와 같은 관변 언론을 통해 반공 민족주의 이념을 직접적으로 대중에 주입했다.


이러한 국가 이데올로기 복합체는 민족의 단결과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초월적 민족주의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음 장에서는 이데올로기 복합체를 통해 확산된 초월적 민족주의의 핵심 축인 민족 정체성, 특히 혈통, 영토, 역사에 대한 인식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3장 혈통, 영토, 정신, 역사: 초월적 민족주의의 핵심 담론 (Blood, Soil, Spirit, and History: Ethnic Nationalism as Hegemonic Discourse in Postliberation Korea)


해방 이후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틀은 바로 혈통, 영토, 정신, 역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였다. 이 담론은 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회 통합을 위한 공통의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 경험과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은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게 만든다.


단군 신화와 민족의 혈통적 순수성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한국 고유의 민족적 뿌리를 찾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단군(檀君) 신화는 민족의 시조이자 혈통적 순수성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단군 기원(檀君紀元)을 공식 연호로 채택하고, 단군이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의 개천절(開天節)을 국경일로 지정하며 단군 신화를 국가의 정통성과 연결했다.


안호상(安浩相)과 같은 민족주의 학자들은 단군 신화가 민족의 순수성과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한국인이 단군의 후예로서 단일 혈통을 이어왔다고 믿으며, 이러한 혈통적 동질성이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6.25 전쟁 당시 남한은 북한군에게 '한 핏줄을 지닌' 동포라는 점을 강조하는 전단지를 살포하며 혈통적 민족주의를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기도 했다.


삼천리 강토와 영토적 정체성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영토를 민족의 혈통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남북 분단은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불리는 민족의 영토가 인위적으로 찢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민족의 단일성과 영토적 통합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주장하며, 통일은 반드시 회복해야 할 민족적 과제라고 역설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祖國近代化)’와 ‘조국 통일(祖國統一)’을 국가의 목표로 내걸고, 민족의 영토를 되찾고 민족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화랑 정신과 역사의 영웅 서사


민족의 역사는 민족의 정신과 정체성을 함양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신채호(申采浩)와 이선근(李瑄根)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민족의 역사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들의 서사로 재구성했다. 이들은 민족의 역사를 끊임없는 외세 침략과 이에 맞선 민족의 저항의 역사, 즉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로 조명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학생과 군인들에게 주입되었다. 교과서와 정훈 교재는 을지문덕(乙支文德), 이순신(李舜臣)과 같은 위인들을 소개하며, 이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화랑 정신(花郞精神)'의 발현이라고 설명했다. 화랑 정신은 민족적 단결, 용기, 그리고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혈통적 순수성과 영토적 통합성을 강조하고, 역사를 외세에 대한 저항의 영웅 서사로 재구성하며 민족적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통합을 유도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민족주의가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어떻게 국가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4장 반공 민족주의: 반공 이데올로기의 민족주의적 토대 (Anticommunist Nationalism: Nationalism as the Foundation of South Korean Anticommunism)


반공 이데올로기는 냉전 시대 남한 사회의 핵심적인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이는 서구의 자유주의 이념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와 깊숙이 결합하여 ‘반공 민족주의(反共民族主義)’라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한다. 공산주의는 민족의 가치와 정체성을 훼손하는 비민족적인 존재로 규정되었고, 반공은 민족을 수호하는 애국적 행위로 자리매김했다.


식민 지배 경험과 민족주의 담론의 전유(專有)


식민 통치 시기, 민족주의 담론의 정통성은 주로 반일 투쟁에 적극적인 공산주의자들이나 좌익 세력에게 있었다. 이들은 친일 행위로 민족의 정당성을 잃은 우익 인사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민족주의 담론의 판도가 뒤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신탁통치 논쟁이다.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합의하자, 한국인들은 또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이때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를 소련의 팽창주의 야욕으로 규정하고, 이에 찬성하는 좌익을 민족을 배신한 ‘민족 반역자’로 몰아세운다. 이들은 친일파를 비판하는 데 사용되던 ‘민족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좌익에게 덧씌우며 민족주의 담론을 전유하는 데 성공한다.


여순 반란사건과 6.25 전쟁: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성 부각


신탁통치 논쟁 이후 공고해진 반공 민족주의는 1948년 여순 반란사건과 1950년 6.25 전쟁을 거치며 더욱 강화된다. 남한 정부는 여순 반란사건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폭동으로 규정한다. 정부와 언론은 반란군을 ‘늑대 무리’에 비유하며, 그들의 행위를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로 묘사했다.


6.25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비인간성과 반민족성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남한 사회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야만적인 침략자’로 낙인찍고, 공산주의자들을 ‘같은 민족의 피를 흘리게 하는’ 반민족적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빨갱이’라는 용어가 반공 민족주의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반공 민족주의와 국가 정당성 확보


이러한 반공 민족주의 담론은 남한 정부의 정당성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스스로를 ‘민족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민족의 생존과 통일을 위한 신성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반공 교육과 정훈 교육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이는 반공 민족주의를 사회 전반에 내면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 민족주의를 더욱 체계화했다. 정부는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반공 민주 정신을 교육의 핵심 가치로 삼고, ‘승공(勝共) 통일’을 국가의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공산주의를 억제하는 것을 넘어 경제 발전과 민족 재건을 통해 공산주의를 압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반공 민족주의는 냉전 시대 남한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탄생한 독특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민족의 정체성을 공산주의와 분리하고, 반공을 민족을 위한 애국적 행위로 승화시킴으로써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5장 1945~1960년 한국의 반자본주의 담론 (Discourses of Anti-Capitalism in South Korea, 1945–1960)


냉전 시대 남한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였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불신과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공존했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서구의 자유주의를 옹호하기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공연하게 표출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일제 식민 통치기에 한국 지식인들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식민지 착취를 심화시키는 구조임을 인식하며 반자본주의 정서를 키웠다. 이는 해방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1946년 미 군정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의 71%, 지방 주민의 14%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또한, 90%에 달하는 응답자들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지지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제기됐다. 좌익은 자본주의가 계급 간의 갈등을 심화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반면 우익은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추겨 민족적 통합을 해치고,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탐욕의 이데올로기’로 낙인찍는 데 일조했다.


‘제3의 길’을 향한 사회주의적 모색


당시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극복하고 한국의 현실에 맞는 ‘제3의 길’을 모색했다. 김규동, 이범석, 박상길 등은 공산주의의 독재와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모두 비판하며, 두 이념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사상’을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분배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가 이데올로기 속 반자본주의


반자본주의 정서는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도 녹아들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민주의(一民主義)’를 통해 민족적 단결을 강조하며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여 민족적 통합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또한, 1948년 제헌 헌법은 사회 정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발전을 명시하며 국가의 경제 개입을 허용하는 사회주의적 조항을 포함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반자본주의 정서를 ‘조국 근대화’의 이념으로 활용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탐욕과 물질주의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다고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근검절약과 협동 정신을 강조하는 ‘새마을운동’을 주창했다. 이는 자본주의가 낳는 병폐를 국가 주도의 개발 이념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해방 직후 한국은 반공주의를 국시(國是)로 내세우면서도,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폐해를 인식하며 반자본주의 정서를 공유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모순은 국가 주도 경제 발전이라는 독특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서구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초월하려는 한국만의 ‘초월적 민족주의’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적 인식을 살펴본다.



6장 개인의 종속: 반개인주의와 집단주의 (The Subordinate Individual: Anti-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in South Korea)


서구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면,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집단주의를 내세웠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개인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보다는, 민족 공동체의 일부이자 국가라는 유기체의 세포로 간주했다. 이러한 반개인주의적 정서는 민족적 단결을 강조하는 초월적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강력한 사회적 규범으로 작용했다.


유기체적 사회관과 개인의 종속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점은 이미 근대 계몽기부터 형성됐다.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국가는 하나의 생명체 즉 유기체로 인식되었고, 개인은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나 기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기체적 사회관은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 통치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개인의 작은 자아(小我)를 버리고 민족이라는 큰 자아(大我)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대아(大我)’ 사상은 해방 이후에도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축으로 이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저서 「민족의 저력」에서 개인의 이익보다 민족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한국인의 고유한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의 위기 극복 역사를 상기시키며, 개인의 희생이 민족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역설했다.


국민교육과 정훈 교육을 통한 집단주의 주입


이러한 집단주의적 가치는 교육을 통해 대대적으로 확산됐다. 1946년 미 군정기 교과서부터 학생들은 '나는 항상 국가, 가족, 학교의 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다. 6.25 전쟁 이후에는 정훈 교육을 통해 군인들에게 '개인적인 행복은 국가와 민족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주입했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한다고 가르쳤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강요했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철학으로 더욱 체계화된다. 박정희는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율과 창의성을 키우는 것을 넘어 민족 공동체에 봉사하는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인 ‘화랑 정신’과 ‘충효 사상’을 집단주의의 근간으로 내세우며, 개인의 희생과 협동이 민족의 발전을 이끌어낸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담론 속의 반개인주의


반개인주의적 정서는 정치적 담론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구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에 기반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이는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적 화합과 통합을 우선하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가치는 한국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은 국가 공동체의 위기를 개인의 희생으로 극복하려는 집단주의적 정신이 발현된 사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집단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고, 국가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오용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자유와 개인의 가치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7장 ‘장엄한’ 제약: 자유에 대한 양가적 태도와 한국의 냉전 자유주의 (Majestic” Restrictions: Ambivalence and Constraints on Liberty and Korean Cold War Liberalism)


남한은 냉전 시대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서구와 달랐다. 자유를 ‘방종(放縱)’과 동일시하며 그 위험성을 경계했고, 자유는 ‘책임(責任)’과 ‘의무(義務)’라는 제약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양가적 인식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됐다.


방종을 경계하는 사회적 시선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36년간 억압되었던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이는 곧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다는 우려를 낳았다. 신문 칼럼과 잡지 기사에는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행동과 여성들의 성적 자유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며, 이러한 ‘방종’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경고했다.


소설과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끈 「자유부인」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교수 부인이 댄스홀을 드나들며 자유를 만끽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자유가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가정을 파괴할 수 있다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보여준다.


정부의 자유 통제와 ‘긍정적 자유’의 강조


국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유를 통제했다. 박정희 정부는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방종한 자유’가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유는 책임과 의무를 동반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안보와 질서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 자유(negative liberty)’와 ‘긍정적 자유(positive liberty)’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부정적 자유는 외부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긍정적 자유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긍정적 자유’를 참된 자유로 간주했다.


냉전 자유주의의 모순과 독재 정당화


한국의 냉전 자유주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유를 내세웠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순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을 강화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방어적 민주주의(defensive democracy)’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결국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가 없는 상태’인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독재를 감행한다. 이는 자유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결합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독특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민족주의와 결합된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8장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 (Korean-Style Democracy: Nationalism and Skepticism of Western Democracy)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국민 주권’을 핵심 가치로 삼았지만, 그 실현 방식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다. 특히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했는데, 이는 한국의 민족적 특수성과 역사적 경험을 강조하는 ‘초월적 민족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링컨의 민주주의와 ‘국민’의 집단적 해석


해방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민주주의 정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링컨의 연설이었다. 이 정의는 국가의 주권이 군주나 특권층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 주권(國民主權)’의 원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국민’은 개별적인 개인들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단일한 민족 공동체를 의미하는 ‘국민 전체(das gesamte Volk)’로 해석됐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해석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민족 전체의 단결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의 핵심을 이룬다.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각


미 군정은 한국에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했지만, 이는 한국 사회의 반자본주의적 정서와 충돌했다. 지식인들은 서구 민주주의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불과하며, 극심한 빈부 격차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서구 민주주의의 개인주의적 가치가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일부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수용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다는 ‘발전주의적’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 국민의 ‘민도(民度)’가 낮아 민주주의의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계몽(啓蒙)’과 ‘훈련(訓練)’을 통해 민도를 높이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논리는 훗날 권위주의 정권이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된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원: 전통과 권위주의의 결합


이승만 정부의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安浩相)은 서구 민주주의를 비판하며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원을 한국의 전통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단군 신화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과 신라 시대의 ‘화백(和白) 제도’를 한국 고유의 민주주의 전통으로 내세웠다. 화백 제도는 만장일치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회의체였는데, 이는 토론과 대립을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대조적이었다. 안호상은 이러한 전통이 개인의 의견 대립을 넘어 민족 전체의 화합과 단결을 추구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으로 계승된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維新) 체제를 선포하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외래품’이라 비판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과 단결 정신에 기반한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신 체제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논리로 작동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담론은 국민 주권이라는 원칙을 공유하면서도, 서구식 자유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민족의 단일성과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유산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9장 박정희 시대의 초월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민족과 반공 (Transcendent Nationalist Ideology under Park Chung Hee: Ethnic and Anticommunist Nationalism)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을 내세우며 초월적 민족주의를 체계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구축한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군인 경력 때문에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통치 이념으로 활용한다. 이 시대의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다.


민족 중흥과 역사적 정체성 강화


박정희는 민족적 자존감을 고취하고 민족적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이선근(李瑄根)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용하며, 한국사를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로 재구성한다. 이 역사관은 외세의 침략과 위기를 극복해 온 민족의 강인한 정신을 강조하며, 현재의 남북 대치 상황 또한 민족적 위기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순신(李舜臣)과 같은 역사적 영웅들을 적극적으로 기념했다. 이순신 장군은 위기의 시대에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을 이순신에 비견하며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했다. 현충사(顯忠祠)의 성역화 사업과 이순신 동상 건립은 이러한 역사적 상징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과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결집하려는 시도였다.


반공 민족주의의 확립


박정희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권은 공산주의를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반민족적’ 존재로 규정하고, 북한을 ‘북괴(北傀)’로 지칭하며 그들의 정통성을 부정한다.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 민주 정신’을 교육의 핵심 가치로 명시하며, 반공이 곧 민족을 수호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정권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국민들에게 끊임없는 ‘정신 무장’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승공(勝共) 통일’을 위한 반공 교육을 받았고, 군인들은 정훈 교육을 통해 반공 민족주의 이념을 내면화했다. 군가(軍歌)와 건전가요(健全歌謠) 또한 이러한 반공 민족주의를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중요한 매체였다. ‘진짜 사나이’, ‘나의 조국’과 같은 노래는 남성적인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강조하며, 국가를 위한 충성을 군인과 국민의 덕목으로 삼았다.


민족 정체성과 권위주의적 통치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혈통적 단일성과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며, 이를 서구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독특한 가치로 내세웠다. 이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각과 결합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권위주의적 통치 이념으로 발전한다.


박정희 시대의 초월적 민족주의는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이는 국민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결집시키고,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작동했다.



10장 박정희 시대의 초월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제2경제’, 집단주의, 반서구 자유주의 (Transcendent Nationalist Ideology under Park Chung Hee: The “Second Economy,” Collectivism, and Anti-Western Liberalism)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민족주의를 내세운 것을 넘어, ‘초월적 민족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더욱 체계화했다. 이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서구의 자유주의 가치를 비판하고,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물질적 풍요를 넘어선 ‘정신적’ 발전을 강조한 ‘제2경제’ 담론은 이러한 초월적 민족주의의 핵심을 이룬다.


‘제2경제’와 반자본주의적 정서의 계승


박정희는 196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물질적 제1경제’는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에 그는 1968년 ‘정신적 제2경제’를 주창하며, 물질적 발전과 함께 민족의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기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하며, 이는 결국 민족적 통합을 저해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정서는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기업가들을 ‘민족 경제의 역군’으로 치켜세우면서도, 그들의 부정한 부의 축적을 비판하고 국가의 경제 계획에 순응하도록 강제했다. 즉, 자본가와 기업은 민족의 번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국가는 그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집단주의와 ‘새마을운동’


박정희 정권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를 국가의 주요 덕목으로 삼았다. 「국민교육헌장」은 개인이 ‘공익과 질서’를 우선시하고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함양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민족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이러한 집단주의적 가치를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뿌리내리게 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운동은 농촌 공동체의 협동과 단결을 강조하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의 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을 증대시키는 데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들이 ‘협동 정신’과 ‘새마을 정신’을 체득하여, 민족 중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가치와 대조되는 ‘한국적 가치’를 부각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반서구 자유주의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한국의 특수성을 무시한 ‘외래품’이라 비판하며, 민족의 단결과 효율적인 발전을 중시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우선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박정희는 유신(維新) 체제를 통해 이러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했다. 그는 국민투표와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를 통해 국민 주권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반서구 자유주의적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에 기반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는 반공과 민족주의를 넘어 반자본주의, 반개인주의, 그리고 반서구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초월적 민족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론: 지배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그 유산 (Conclusion: The End, and Continuation, of Ruling Ideology)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초월적 민족주의는 해방 직후의 위기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이데올로기는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이 되었지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물결 속에서 그 헤게모니를 잃게 된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종언: 국가와 민족의 분리


초월적 민족주의의 핵심은 '국가와 민족의 동일시'였다. 즉, 국가는 민족의 유기체적 몸체로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지는 유일한 주체로 간주됐다. 그러나 1980년 광주 항쟁은 이러한 동일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군사 정권이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모습을 보며, 대중은 국가가 더 이상 민족의 수호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국가는 민족을 억압하고 해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민족주의 담론의 정당성은 좌익 민족주의자들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분리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 이들은 민족의 주권이 민중에게 있으며, 독재 정권은 민족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반민족적'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민족의 주권을 되찾는 '민족 해방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을 뿌리째 흔들었으며, 민족주의가 더 이상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초월적 민족주의의 지속적인 유산


초월적 민족주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생명력을 잃었지만, 그 핵심 요소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 한국의 권위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축하고 지속했는지에 대한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초월적 민족주의의 유산을 성찰해야 한국인의 무의식에 잠재해있는 정신적 근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체제 전환: 탈자유주의적 미래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