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용 Apr 28. 2022

젊음은 일종의 백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서평


 젊음은 늘 칭송받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가는 찬란한 시기라고 표현되며, 젊음을 지나친 이들은 아쉬워하며 한껏 그때를 미화한다. 그러나 모두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젊었을 때 겪는 '뭐라도 해야 한다'라는 심리적 압박감, 하루하루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정이 그 외 기쁨보다 더 고통스러운 이도 분명히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본작)은 그런 젊은 한 가운데 고뇌하는 청년을 풍부한 감상으로 그려낸 명작 소설이다. 


 본작의 주인공, '베르테르'에게는 젊음 특유의 치기 어린 패기가 돋보인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는 18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이기도 하다. 당시 문학계의 주류였던 계몽주의 사조에 반하여 나타난 감정의 해방, 개성의 존중 등을 주장한 운동인데, 본작에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베르테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본작은 굉장히 감정적이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온 세계는 소멸했다. 


 본작이 얼마나 감정적인가는 초반부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졌을 때 바로 드러난다. 세계가 소멸할 정도, 그것이 '베르테르'가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의 크기였다. '베르테르'에게 있어 사랑은 위험했다.


"당신은 무슨 일에나 너무 지나치게 열중해요. 그것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자중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때부터 '로테'는 '베르테르'의 파멸을 짐작했을 수 있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딱 그만큼 폭력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했다. 그래서 '로테'에게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좌절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소멸할 정도의 감정을 느낀 '베르테르'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고작 좌절이라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사랑의 부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의 부재와도 같았다.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불쌍한 '베르테르'는 사회에 속해 있지만 의미는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길가에 놓인 돌멩이와 '로테'를 사랑할 수 없는 '베르테르'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베르테르'는 '로테'를 잊기 위해 떠났다. '로테'를 잊고 잘 살기 위해 일했다. 잘 사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저 '로테' 없는 삶이라는 불가능한 도전을 했다고 일축할 수도 있는 행적이었다. 


 상대의 기분만 흘끗흘끗 살피는 이 거리의 구역질나는 인간들, 그 속에 섞여서 사는 비참한 영광, 이 따분함! 반걸음이라도 상대방을 속여서 앞지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녀석들의 출세욕! 


 그러나 '베르테르'가 본 사회는 가혹했고 불합리했다. '베르테르'가 주관적으로 본 사회의 단면은, 자신 직접 발을 들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베르테르'는 생각이 너무 깊었다. 자신에게 매몰되기 십상이었고, 그러한 감상은 본인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보잘것없는 역량과 재능을 가지고도 자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자신의 역량과 재능에 절망하고 있는 것일까?

 

 '베르테르'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다. 미래가 창창하고 문학과 예술에 나름대로 조예도 있으며, 꽤나 다독하는 젊은이였다. 다만, 관심 없는 분야는 철저히 배척하는 독서법은 '베르테르'의 매몰에 가속도를 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정 나는 한 사람의 방랑객, 이 지상의 한낱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네들이라고 해서 그 이상의 존재일까?


 '베르테르'는 젊고 감각적이고 낭만적이어서, 논리적이지 못하고 서툴렀다. 이런 모습이 젊음의 일부이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그래도 자신을 타자화하여 바라 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본 '나'는 '로테'에 대한 마음을 멈출 수 없는, 이토록 비이성적인 존재였지만, '베르테르'는 알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베르테르! 당신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어요. 스스로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고 있어요. (...)"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본인도 이미 결혼한 상황에서 '베르테르'와의 관계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해야 할 때였다. '로테'는 고뇌했다. 자신은 '베르테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베르테르'만 구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여실히 알고 있었기에 시작된 고뇌였다. '로테'의 감정은 모호했다. '알베르트'가 없었으면 '로테' 자신은 '베르테르'와 이어졌을까 반문해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청을 거절하고 '로테'를 찾아왔다. 잠깐 승강이가 있었지만, 이내 둘은 입을 맞췄다. 둘의 감정은 짧은 순간, 같은 공간에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베르테르!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단 한 번의 확인, '베르테르'에게는 충분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 확인로 '베르테르'는 확신했다. '베르테르'가 '알베르트'에게 권총을 빌리고, 그 과정에서 권총이 '로테'의 손을 거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확신에 아주 작은 반대 가능성마저 제거됐다.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작은 망설임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 모든 정황이 말해주고 있다. 


 본작이 전기적 특징을 띤다는 의견이 있다. 작가인 괴테가 샤르로테 부프 부인을 사랑했던 경험, 유부녀를 사랑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예루살렘의 일화에서 착안하여 집필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전기 소설로만 치부되어선 당연히 안 될 것이다. 본작이 담고 있는 수많은 문학적 사유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또, 일각에서는 '베르테르'의 죽음이 뜻하는 바가 당대 사회상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는 의견도 있다. '로테'와 '알베르트'가 결혼한 배경에는 사랑보다는 사회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다. 서로의 부모님에 의해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로테'가 '베르테르'를 만나고 흔들렸던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잊기 위해 떠났을 때도 사회적인 불합리, 부조리 따위를 겪지 않았더라면 결국 '로테'를 잊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본 주장을 뒷받침한다. 결국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은 뒤집어 '당시 사회는 비정상적이었기에 비극이 일어났다'로 귀결될 수 있다. 


 본작은 잘못 읽으면 자칫 극단적 선택을 미화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당대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파장이 컸고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니 상술한 내용을 무작정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부분에만 주목해서는 안 되고, 시선을 옮겨야 한다. '베르테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굴복했지만, 추앙할 필요까지는 없다. '베르테르'가 이겨내기에 '로테'와의 사랑은 너무 독했다. 그뿐이다. 


 '베르테르'를 통해서 본 '젊음'은 곧 '슬픔'으로 이어진다. 주체할 수 없는 격동의 시기, 그렇기에 패기롭게 돌진할 수 있는 시기, 둘이 곧 젊음의 각 단면이지 않을까? 


 젊었기에 용서되는 행동을 찾아서 해야 한다. 젊음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고, 끝없는 불안감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같은 백신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위험하고, 누군가에는 아무런 위해 없이 지나가듯, 젊음 또한 마찬가지다. 젊음은 일종의 백신이다. 추후의 안전을 위해 지금 맞아놔야 하는 격통과 위험, 그러나 모두에게 위험하지는 않은, 대부분에게 그저 지나가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독한, 그런 백신 말이다. '베르테르'에게 사랑이 너무 독했듯, '젊음'이 너무 독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내성을 키워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부딪혀야지 별수 있을까? 본 서평은 마무리가 어설플 수밖에 없겠다. 필자도 젊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문예출판사

작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옮긴이 : 송영택


-참고 자료


이경규, 베르테르의 자아 정체성 문제 고찰 - 인성교육의 관점에서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017.


김완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타난 주관성 연구, 2004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a3b2968645a4799929b3feaca458a8c

작가의 이전글 운명의 개척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