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빌런 고태경 서평
배고픈 예술가. 이 단어를 낭만, 신념, 열정 등이 먼저 떠오른다면, 그 사람은 예술가 기질을 띄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을 마주하고 살다 저 단어를 보면 부정적인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예술인.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이유로, 겪어봤다면 쓰라린 자기만의 이유로 부정한다. 굳이 예술인에 한정지을 필요도 없다. 사실 자신이 열심히 몰두했으나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는 배고프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다. 관련 업계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스크린에 보이는 장면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컷을 촬영했고, 로케이션, 조명, 음향 등 다사다난한 현장 상황과, 믹싱, 색 보정 등 후반 작업의 치열한 과정을 모두 이겨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타산이 맞지 않는 작업이지만, 누군가는 한다. 돈이 되는 상업영화를 찍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것을 찍을 수 있기까지 가기 위한 고행은 피할 수 없다.
https://ko.dict.naver.com/#/entry/koko/9e2943e41bdd4e03b3b6a09393936fcd
작품 제목에 나오는 GV는 Guest Visit의 준말로 ‘관객과의 대화’를 뜻한다. 영화감독이나 제작 관계자들이 직접 영화에 대해 설명도 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도 주고받는 영화 문화를 일컫는 용어다.
다른 말이지만, GV는 콩글리시라고 한다. 찾아보니 보통 해외에서는 Q&A Session이라는 그냥 평범한 용어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GV 빌런은, 일종의 인터넷 밈으로 보통 영화 관계자가 아닌, 무례한 관객을 칭한다. 예의 없는 질문, 상황에 맞지 않는 배우 스캔들과 같은 개인적인 질문 등을 하는 사람과 비평 및 평론을 하며 가르치듯 말하는 등이 GV 빌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GV 빌런 고태경’은 은행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정대건 작가님의 장편소설로, 2020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TUlmMUEuhY&t=296s
보통 처음 소설로 쓴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삶이 많이 녹아든다고 한다. ‘GV 빌런 고태경’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난다. 주인공인 ‘혜나’와 ‘승호’는 마치 작가의 페르소나 일부를 나눠 가진 듯 보인다.
작가는 과거 ‘투 올 더 힙합 키즈(2012)’라는 힙합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적 있는 감독 출신이고, 실제로 2018년 작중 무대가 되는 바르샤바국제영화제에 참여해 특별언급상도 수상한 적 있다.
본작에서 ‘혜나’ 또한 과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힙합팬이라면 아는 클럽 마스터 플랜을 언급하고, 중요한 일 전에 힙합 음악을 듣는 등 힙합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으며, 바르샤바 국제 영화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승호’는 작중 서울대학교 철학과 출신이라, 같이 영화 아카데미에 진학한 동기들 중에서는 비전공자에 겉도는 느낌이고, 조악한 편집 수준의 다큐멘터리 하나만 찍어봤다고 한다. 작가 또한 소위 말하는 SKY대학 철학과를 나오고 영화아카데미에 진학했으니, 연관이 없다 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작가와 작중 인물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소설을 읽을 때 할 수 있는 유희 중 하나다. 이런 유희가 소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고 하면, 2/3 정도는 맞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어서인데, 그러면 왜 반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작가와 인물을 비교하면서 어느 순간 작중 인물이 소설 안에만 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감각을 한 번이라도 한다면, 몰입도의 깊이가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소설을 읽는 데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영화와 인생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영화라고 대답한 프랑수아 트뤼포’를 지우개로 열심히 지웠다. …그러나 아무리 지워도 흔적이 남았다. 9p
본작은 확실히 영화인을 위한 소설이라는 것을 초반부터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를 조금 더 깊이 좋아한다면 알 수밖에 없는 실존 인물, ‘프랑수아 트뤼포’에 대해 언급하며 ‘혜나’는 어떤 인물인가를 설명한다.
프랑수아 트뤼포부터 설명하자면, 유명한 시네필이다. 시네필은 프랑스어로 영화(Cinéma)와 사랑(Phil)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작가주의 영화를 선호하는 매니아를 표현하는 말이다.
작가주의란 영화를 볼 때 감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 위주로 판단하는 경향을 뜻하며, 이러한 작가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이도 프랑수아 트뤼포다. 본작에서 히치콕에 대한 언급도 종종 나오지만 트뤼포를 언급한 이유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다시 말하면, ‘혜나’는 작가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감독이고, 이는 상업적이고 타협해 돈을 벌고자 하는 이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더 높이 두는 인물이라 보면 된다.
다만, 이 부분을 단순히 ‘혜나’의 캐릭터성만을 표현한 구절로 보기에는 다소 아쉽다. ‘그러나 아무리 지워도 흔적이 남았다.’라는 구절은 과거와 연관 있어 보인다. 과거 그 구절은 쓴 이는 트뤼포도 히치콕도 아닌 ‘혜나’다.
‘혜나’는 스스로 의지를 통해 트뤼포나 히치콕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다짐했다. 이런 다짐은 작중 초반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자신의 신념을 담은 책을 중고로 팔려고 하는 부분부터, 신념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꾹꾹 눌러 쓴 신념을 빠득빠득 지우고 있는 ‘혜나’에게서는 단순히 중고책 가격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만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비추어진다.
아직 일인분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초조함. 칠 년 넘게 고시를 준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낙향한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23P
본작은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혜나’는 이루지 못했기에 초조해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내야 하는, 아니, 그 이전에 가족의 일원으로, 나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 해내야 하는 최소치를 하지 못한 듯한 죄책감에 쌓여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신은 진정 일인분의 사람이 맞는 것인지, 하는 자조적인 질문을 반복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왜 감독의 말을 듣겠어. 남들보다 잘 선택해야 돼. 선택의 프로가 되어야 해.” P34
현장에서 지휘하는 감독은 선택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잘못된 지시 하나로 고생하는 수십 명의 사람, 지체될수록 지쳐가는 분위기, 좋은 결과물과는 멀어져가는 반복되는 컷 등.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선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혜나’의 이 모든 상황도 누군가의 강요로 지속된 게 아니다. 선택의 결과다. 선택은 영화든 삶이든 좌지우지한다.
“나는 영화를 볼 때 몰입해서 보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체를 보려는 거야.” 95p
본작의 또 다른 주인공인 ‘고태경’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혜나’와 같은 태도는 아니다. ‘고태경’의 모습에는 그렇다 할 조급함이 딱히 보이지는 않는다. ‘고태경’에게 주로 보이는 모습은 신중함에 가깝다.
‘고태경’은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전체를 보려고 한다. 짜임새와 구성 등 이는 순수하게 제작자의 시선이다. 여기서 반문해볼 수는 있다. 이것은 옳은 태도이고, 옳은 자세인가?
GV는 아까 말했듯 소통을 위한 자리, 즉 말 그대로 ‘관객과의 대화’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영화를 제작자의 시선에서 보고, 자신의 영화 제작을 위해 공부하는 태도로 GV에 참석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고태경’이 50대가 될 때까지 자신의 영화를 찍지 못했던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신중한 태도로 결정을 유예하는 것은, 냉혹한 시장에서는 도태라고 표현한다. 철저한 준비보다 필요한 건 무모한 도전일 때도 있다.
“극장이란 곳은 참 재미있지. 결국 우리는 스크린에 쏟아진 빛을 보기 위해 일부러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98p
모든 결과물은 반짝반짝 빛난다. 수많은 노력이 합쳐져 만들어낸 산물이라 더 그럴 것이다. 이제 속사정을 알게 되면, 마냥 빛난다고만은 보기 힘들어진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고, 빚더미에 앉기도 하고, 아무런 수익 없이 전전하는 뒷모습을 본다면, 지독히도 어둡고 처절하다 생각이 절로 들 수 있다.
‘혜나’와 ‘고태경’은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영화 제작이라는 빛을 향해 나아간다. 빛을 위해 어둠속으로 들어간다는 ‘태경’의 표현을, ‘혜나’가 낯간지러워 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틀린 말은 딱히 없어서일 것이다.
“비싼 수업료 치른 걸로 생각해. 실패도 못 해본 사람들이 수두룩해. 실패에 자부심을 가져.” 138p
실패란 것은 도전했다는 증거다. 증거는 ‘혜나’가 꾹꾹 눌러썼던 글귀처럼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란 것은 중요하다. 추상적일 수 있는 당시의 기억, 분위기, 마음가짐 등을 바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주는 이정표 역할도 해주기에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202p
우리는 포기할 때 좌절을 동반한다. ‘여기까지구나.’라는 인식을 통해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태도를 한번 반전시켜보는 것은 좋은 시도다. 실패, 과거의 노력, 현재의 상황 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지금 당장 혹은 미래의 행복에 방점을 찍으면 해답은 쉽게 나올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만 한다면, 실천하지 않을 이는 없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241p
‘고태경’은 많은 이들에게 말한다. 어쩌면 이 대사는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작가 입장에서는 물론 독자에게 하는 말일 테지만 말이다.
‘자신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라.’ 진부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말이다. 우리는 영화감독보다 더 선택의 프로가 돼야 한다. NG(No Good)는 걷어내고 Okay Cut만 써도 되는 영화감독과는 달리, 우리는 NG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은 가꿨을 때 가치가 빛난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주체적인 삶이란 말에서 멀어진 인생을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우리는 우리 마지막을 정할 수는 있다.
‘내 삶은 어떻게 나아갈까’처럼 너무 길게 보는 것, ‘내 삶 마지막 장면을 이래야 해!’처럼 너무 짧게 보는 것보다는 마지막 시퀀스를 짜본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퀀스는 단위다. 컷이 모여 씬이 되고, 씬이 모여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가 모여 영화가 된다.
우리 삶 마지막 시퀀스를 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향해 치닫는 모든 구조를 짜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당연히 어려운 게 맞기도 하다. 한 편 영화를 찍기도 어려운 판국에 인생을 살아가는 게 쉬울 거라 생각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어렵겠지만 한번 써보자. 자신 인생의 엔딩 시퀀스를.
작가 : 정대건
출판사 :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