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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Jun 09. 2023

진실, ‘나’의 지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안다’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감각적으로 처리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는 얼마나 깊게, 정확히 알고 있느냐에 따라 진척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는 예술적인 분야도, 그 기초를 잡아주는 지식이 없다면 부실할 수밖에 없다.


 오늘 숨 쉬고 있는 ‘나’는 수많은 어제를 거쳐온 상태다. 자신이 겪어온 숱한 시간에 대해, 본인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기반이 부실한 건축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진실을 하나하나 젠가처럼 빼놓고 쌓아가다 보면, 우리는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2013년 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다자키 쓰쿠루’가 그간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하며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7p


 본작의 첫 문장은 현재 36살인 ‘다자키 쓰쿠루’가 20살인 시기에 발생한 어떤 사건에 대해 덤덤히 풀어나간다. 절친한 고등학생 때 친구 무리에서 일방적으로 방출된 ‘다자키 쓰쿠루’는 16년 정도 지난 오랜 시간까지 그 원인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다.


또한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일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하고. 13~14p     


 ‘다자키 쓰쿠루’는 친구들과 달리 이름에 색이 없었다. 무슨 말이냐면, 아카마쓰 게이는 붉을 적(赤), 일본어 훈독 아카(あか), 오우미 요시오는 푸를 청(靑), 일본어 훈독 아오(あお), 시라네 유즈키는 흰 백(白), 일본어 훈독 시로(しら) 구로노 에리는 검을 흑(黒), 일본어 훈독 구로(くろ) 등 각각 이름에 글자 그대로 색이 들어갔다. 본인만의 색이 없다는 것은, 색채 가득한 친구 무리 속에 살아갔던 ‘다자키 쓰쿠루’에게 일종의 소외감을 느낄 거리였다.


“그렇게 존재하고 존속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 “우주처럼.” 29p


 고등학생 당시 ‘다자키 쓰쿠루’에게 5명 모임은 단순한 친우 관계를 넘어서는, 마치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모든 것이 조화로운 완벽한 형태 등 형이상학적인 가치까지 지닌 공동체였다. 이러한 인지는 ‘다자키 쓰쿠루’ 외 나머지 넷에게도 같았다.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 나 마찬가지니까 52p


 ‘기모토 사라’는 현재 36살인 ‘다자키 쓰쿠루’의 조력자이며, ‘다자키 쓰쿠루’가 자신이 그토록 칭송하던 모임이 와해된 근원적인 이유를 마주하려고 하지 않자 적극적으로 진실을 파헤치기를 강권하는 인물이다.


… 이러한 하루키의 발언을 참조할 때 『색채』에서 사라가 쓰쿠루(일본)로 하여금 진실(역사적 폭력 여부)을 확인하라는 위의 대사는 ‘종군위안부’나 ‘난징 학살’과 같이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덮어버리려 하지 말고, 진실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밝혀냄으로써 역사 앞에 떳떳해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풀이된다.

 조주희 (2016)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의식 고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중심으로-, 일본언어문화, 36, 369-387, 374p

 

 … 작품의 근저에 깔려있는 작가의 사회적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2011년 6월 9일 바르셀로나에서 한 하루키의 연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루키는 예로부터 많은 자연재해를 겪어왔던 일본의 현실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는 그러한 자연재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체념의 세계관(あきらめの世界観)’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이러한 일본인의 회피적 자세의 과잉을 직시한 하루키는 일본인의 의식 속에 무너져버린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 그의 관심은 사회나 자연재해가 아닌 그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 즉 올바른 가치기준의 확립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윤혜영 (2015)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の年)』 론 - ‘체념의 세계관’과 자성(自省)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 일본학보, 105, 219-236, 220p.


 또, 본작을 연구한 논문과 여타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진실’은 단순히 작중 인물이 순례를 떠나는 이유나 더 나아가기 위한 소재 따위가 아닌 작품 외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역사적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태도나 일본인들의 잘못된 자세 등이 관련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을 보다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끔 도와주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겨우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터뜨리는 3킬로그램이 안 되는 분홍색 살덩어리였다. 먼저 이름이 주어졌다. 그다음에 의식과 기억이 생기고 이어서 자아가 형성되었다. 이름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76p


 ‘다자키’는 성이고 ‘쓰쿠루’는 이름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부모는 일본어 훈독이 쓰쿠루(つくる)로 같은 두 한자, 비롯할 창(創)과 지을 작(作)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이름일지 고민하다 결국 지을 작(作)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인생이 이름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14년 동안 철도역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는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쪽이기도 했다. 과거 넷은 대학 진학 시 나고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선택해 도쿄로 대학을 진학하기도 한 ‘다자키 쓰쿠루’는 이름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뭔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아직도 똑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태도 또한 비롯할 창(創)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먼저 하루키는 왜 쓰쿠루의 고향으로서 나고야를 선택한 것일까. 이에 대해 시바타 쇼지(柴田勝二)는 도쿄와 나고야를 근대와 전근대, 일본과 아시아 국가의 대립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즉 나고야는 도쿠가와(徳川)시대 즉 전근대를 의미하며, 나고야를 탈출한 쓰쿠루가 도쿄에서 엔지니어가 되는데, 이는 20세기 초 중국과 조선을 젖히고 근대화의 길을 걸은 일본을 상징한다고 지적한다. 다른 견해로 네 명의 친구들이 나고야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 그들의 대학입학 시점을 1995년 4월로 보고 1995년에 일어났던 일본의 사건들과 접목시켜 해석한 연구도 있다. 히라노 요시노부(平野芳信)는 작품의 현재 시점을 2013년으로 보고 그들이 대학입학시험을 치른 1995년 1월에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이 일어났고, 또한 그 해 3월에 도쿄에서 ‘지하철 사린(サリン)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학력보다도 안전을 우선시했던 네 명의 친구들은 자기 능력보다 ‘한 단계 낮춰’ 나고야의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작품의 무대로서 나고야가 선택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라고 설명한다.

 조주희 (2016)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의식 고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중심으로-, 일본언어문화, 36, 369-387, 375~376p.


 나고야라는 지역이 쓰인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또, 작중 전개만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나머지가 왜 고향인 나고야에 남아야만 했느냐에 대한 의문도 일부 해결될 수 있는 내용이어서 서평에 인용했다.


 작중에서는 단지 나머지 넷은 ‘자신의 미래보다 현재 공동체의 존속이 더 중요해서 나고야에 남았다는 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데, 상술된 역사적 내용을 포함해 이해하면, 조금 더 넷의 선택이 이해될 수 있어 보인다.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 1권

https://www.youtube.com/watch?v=nApjk6nC2N0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 2권

https://www.youtube.com/watch?v=-tGkv9IAbRY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리스트의 순례의 해 3권

https://www.youtube.com/watch?v=BqFALCTDMGU


하이다가 남긴 것은 작은 커피 밀과 반쯤 남은 커피콩 봉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LP 3장 세트), 그리고 신비로우리만치 깊고 맑은 한 쌍의 눈길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159p


 ‘하이다 후미아키’는 ‘다자키 쓰쿠루’가 22살에 만난 2살 연하인 친구로, 이름에 회색을 뜻하는 재 회(灰), 일본어 훈독 하이(はい)가 들어가, 역시 이름에 색을 지닌 인물이다. 동시에 ‘하이다 후미아키’는 신비로우면서 상징적이다.


 먼저 ‘하이다 후미아키’가 주로 듣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 향수(鄕愁, Le mal du pays)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연주곡으로, 과거 시라네 유즈키가 자주 치던 피아노곡이다. 이러한 접점은 ‘다자키 쓰쿠루’를 야릇한 감상에 빠져들게끔 유도한다.


 대화도 잘 통하고, 과거 자신 친구들만큼 조화롭지는 않지만 안정감을 느낄 정도로 편안한 ‘하이다 후미아키’는 22살 ‘다자키 쓰쿠루’한테는 친구 이상의 의미로 다가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하이다 후미아키’는 과거 그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244p

 ‘다자키 쓰쿠루’가 원래 인지하던 ‘나’는 손바닥 정도 크기였다. 과거 친구들을 16년 만에 한 명씩 만나며 진실에 다가갈수록 인지하는 ‘나’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과거 손바닥 정도였던 ‘나’는 작아졌다.


 과거 ‘나’는 희석돼 결국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진짜고 더 중요한지는 모호하지만,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확실하다. 이는 자아의 상실일까, 아니면 자아의 확립일까, 정말 대사 그대로 패러독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신입 사원 연수 세미나에서 늘 내뱉는 말이야. … 손톱을 뽑을 건지 발톱을 뽑을 건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거야. 자, 어느 쪽으로 할 텐가. … ‘발로 하겠습니다’ … 왜 손톱이 아니라 발톱을 선택했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발톱으로 한 겁니다.’ …웰 컴 투 리얼 라이프.(Wellcome to real life.)” 245~246p


 삶 속 부조리한 선택은 일상과 맞닿아 있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기를 종용하는 곳,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의 단면이다. 이러한 의미를 작중 ‘다자키 쓰쿠루’에게 집중하면, 진실을 알아가는 순례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 과연 더 나은 선택이었냐라는 물음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


“누구든 무거운 짐은 싫어하죠. 그렇지만 어쩌다 보면 무거운 짐을 가득 끌어안게 됩니다. 그게 인생이니까. 세 라 비.(C’est la Vie.)” 294p


 누군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닌 마치 선택처럼 보이는 어떤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다자키 쓰쿠루’가 ‘기모토 사라’에 권유에 의해 순례를 떠날 때, ‘기모토 사라’가 문제를 해결 못 하면 자신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성 강요가 섞였다고 해도, 이는 ‘다자키 쓰쿠루’의 선택이다. 순례를 떠나지 않고 ‘기모토 사라’와 헤어져도 됐지만, 결국 ‘다자키 쓰쿠루’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은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381p


 ‘다자키 쓰쿠루’는 과연 모든 진실을 찾고, 순례의 끝에 당도했을까? 글쎄, 그런 판단은 독자가 스스로 읽고 판단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결국 진실을 얻어 ‘기모토 사라’와 더 먼 미래를 같이 간다 해도, 멋진 텅 빈 그릇인 지금의 ‘다자키 쓰쿠루’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순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 이미 갖고 있을 것일 수도 있다.

 ‘나’를 견고하게 쌓아가는 과정에, 그 이전 ‘나’는 잃을 수 있다. 상술했던 패러독스, 역설이다. 그럼에도 나아갈 것인지는 이제 선택의 문제다. 현재의 ‘나’보다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이 선택은 ‘기모토 사라’가 ‘다자키 쓰쿠루’에게 했던 강요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한번은 ‘나’를 찾기 위한 순례를 떠나야 할까. 애초에 그렇게 ‘나’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 시간이 주어지기나 할까. 그것이 선택인 척 연기하는 강요일지라도 우리는 늘 선택하고 산다. 이번에도 역시 미래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일 뿐이다.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엮은이 : 양억관

 출판사 : 민음사


 참고자료     


윤혜영 (2015)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の年)』 론 - ‘체념의 세계관’과 자성(自省)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 일본학보, 105, 219-236.


조주희 (2016)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의식 고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중심으로-, 일본언어문화, 36, 369-387.


강윤경(20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론 - 무의식과 의식이 혼재하는 공간으로서의 꿈의 세계 -, 일본어문학회, 23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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