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od Influence Oct 04. 2019

경쟁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입시 정보도 쿨하게 공유하는 엄마들의 세상을 바라며"

“OO이가 그렇게 공부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네. 친하게 지낸다고 몇 년을 같이 다녔는데도 정작 자기 애한테 방해될 것 같은 건 절대 얘기해주지 않는구나.”

어느 날 저녁 아파트 아줌마들과 커피 한잔하고 오겠다고 나간 아내가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몸을 부리며 흘리듯이 한 말이다.


내용인즉, 초등학교 때부터 큰 아이와 친하게 지낸 OO이는 집에서 외동딸이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을 한 것을 계기로 큰 애와 베프가 되었다. 친구들과 관계가 좋던 큰 애는 OO에게도 다를 것 없이 잘 받아주고 서로 죽이 잘 맞았기에 OO의 엄마는 큰 아이를 상당히 맘에 들어 했다. 엄마들끼리 만날 때면 OO의 엄마는 아내에게 OO이 외동딸이라 형제자매가 없어 큰 아이랑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종종 했었다. 그렇게 친해진 관계는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고, 엄마들 간에도 수시로 교류가 지속되었다. 특히, OO이는 큰 애가 하는 것을 같이 하기를 좋아했다. 옷 입는 스타일부터, 그림 그리는 취미생활, 헤어스타일, 방송댄스 따라 하기 등등…큰애가 뛰어난 패션 감각을 가졌거나 인플루언서라기 보다 또래 아이들이 친한 친구와 비슷하게 행동하려는 동조(conformity) 현상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을 함께하는 OO이었지만 그의 엄마가 공유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공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어디로 봉사활동을 가는지, 교내 특별활동은 어떤 걸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일종의 경쟁자라고 생각한 건지, 경쟁 자체도 되지 않아서 얘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왠지 모르게 마음이 헛헛해지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이가 OO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예술계 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고 부모님도 찬성했다는 얘기를 하고 난 뒤였던가…그 아이의 엄마는 비로소 OO의 학원 정보나 인문계 입시 정보에 대해 조금씩 공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또 다른 경쟁자라는 사실이 참 슬픈 일이긴 하지만 경쟁에 대한 현실을 헤아려보고 생각을 정리한다면 일상을 좀 더 스트레스받지 않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사회나 경쟁은 존재한다. 심지어 식물이나 미생물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기 생을 보전한다. 경쟁에 관해 가장 유명한 이론 중 하나로 160년 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주장한 자원 희소성 원리를 들 수 있다. 세상의 자원은 유한하고 희소하기 때문에 생명체 간의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장대익교수는 “경쟁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화의 동력이 된다”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 조상은 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적어도 그들은 주변 동료들보다는 잘했던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경쟁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경쟁이 치열한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예부터 좁은 땅덩어리(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살림 좀 나아졌으려나?)에 그 속을 아무리 파도 거의 나오는 것이 없다. 아무리 뚫고 쳐다보고 기다려도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늙은 땅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다 보니 가진 몸뚱이 하나라도 잘 만들어 살아남아야 한다는 DNA가 뼈 속 깊이 박혔을 것이다. 이건 우리나라 학부형들의 교육열이 보증한다.


성장 일변의 나라에 살면서 돈 잘 벌고, 힘 잘 쓰고, 남에게 부러움 받는 직업이 자연히 정리되었다(이건 사대주의가 한몫 단단히 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구는 줄었지만 그 길로 가는 길은 더욱 좁고 험난해졌다. 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쓰앵님'들을 모시고 대입을 기획하며 트랙을 닦아 놓는다고 하니 남다른 DNA인 게 확실하다.


우리나라는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경쟁의 길이 너무 적다. 오로지 한 길뿐이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 길의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다. 길이 끊어질지, 내려앉을지, 천년 묵은 구렁이가 앉아 있을지 알 바가 아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에 가는 인구는 30% 남짓 되었다. 나머지는 취업으로 또 다른 길을 통해 성인으로 접어들고 사회재생산에 기여했다. 최근엔 70%대로 좀 줄긴 했지만 진학률이 80%를 넘던 적도 있다. 좀 '웃픈'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직업은 40% 미만이라고 한다. 나머지 일자리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종이쪽지를 얻으려고 그 고생을 한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결과만 놓고 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면, 모든 학생들이 결국에는 거름종이가 깔린 깔때기 같이 좁아터진 출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남들과 비교하고 서열을 정하는 것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과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행복은 극히 소수의 일부가 소유할 뿐이다. 경쟁에서 진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패자는 승자에 대해 증오를 갖고 승자는 패자의 증오를 두려워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럴수록 승자는 패자들과 함께 할 수 없고 점점 더 자기들만의 벽을 만들게 될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모여서 나눴던 얘기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모이면 10대엔 부모의 재산이 얼마인지를 비교하고, 20대엔 어떤 대학에 들어갔는지 비교한다. 30대엔 어떤 회사에 입사했는지 비교하고, 40대엔 어떤 직급을 달았는지 비교한다. 50대엔 자녀가 어떤 대학에 들어갔는지 비교하고, 60대엔 자녀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비교한다. 70대엔 연금을 얼마나 받는지 비교하고, 80대엔 어디서 죽고 어디에 묻힐지 비교하다 요단강을 건넌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했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다. 너무 징그럽게 리얼하고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아버지 세대에게 들었는데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더 슬프다.

이런 삶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답할 수도 단정적인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바램이 있다면, 이 사회가 좀 더 경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환되고 보다 많은 선택의 여지가 생겼으면 한다. 준혁이는 대학을 가고, 현아는 취업을 하며, 서희는 창업을 하고, 선미는 창직을 하고, 택진이는 탐험을 떠나고, 영수는 나라를 지키는… 각자 다른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처럼 경쟁이 분산되면 보다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 타면 갈 수 있는 북유럽의 어떤 나라들은 이렇다고 한다. 못할 것은 아닌 것 같아 소원해본다.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되도록 바로 옆 사람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노력할 수 있는 사회, 곰에게 쫓기고 있는데(영화 ‘레버런트’에서 나오는 진짜 만나면 죽을 수 있는 곰 말이다) 옆 사람보다 빨리 뛰면 안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헬조선’이 아닌 사회, 내가 타인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지금의 나보다 좀 더 확장된 자아를 가진 수준 높은 삶의 통합을 이루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본다.


[참고문헌]

송호근(2013).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서울: 이와우.

장대익(2019). 사회성이 고민입니다. 서울: 휴머니스트.

매거진의 이전글 정리정돈에 대한 제2차 정전협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