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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Oct 04. 2019

"둔필승총(鈍筆勝聰)"의 재해석

요즘 큰아이와 아내의 걱정은 수학이다. 아이의 수학 성적이 떨어져 반타작을 못 하게 된 마당에 아직 초등학생이니 괜찮다고 하기엔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하다. 수학을 못했던 아비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지 정말 DNA는 어쩔 수 없나 보다고… 식구들의 생각이 이렇게 일치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마당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다 진짜 모든 비난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이가 문제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단한 문제는 잘 푸는 것 같은데, 네 자리 이상의 숫자가 곱해지고 나눠지는 연산과 도형은 대략 난감이었다. 진짜 문제는 어른도 힘든 계산을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차원적으로 구구단만 써도 되는 간단한 연산은 암산으로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복잡한 만 단위 이상의 계산과 머리에 공식을 생각하기도 버거운 도형의 넓이와 부피 계산을 어찌 머리로만 풀려 한단 말이냐. 그렇게 복잡한 계산은 공책에 수식을 써가며 풀어야 길이 보이지…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는 ‘인간은 자신에게 오는 무한대의 자극을 셰마(Schema)라는 인지구조로 끊임없이 정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복잡한 문제를 만나면 ‘개념화’를 해야 좀 더 쉽게 풀 수 있다. 우리가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되새기는 이유도 개념화를 하기 위해서다.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한 붓이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는 정약용의 말이다. 정약용은 메모의 중요성을 말했을 테지만, 좀 다른 의미로도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종이에 적는 일은 머리가 어려워하는 개념화를 보다 쉽게 해주고 복잡한 현상을 보다 빨리 인식하게 해준다.


적는 행위는 단지 기억의 보조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극을 개념화하고 헤아려서 문제를 풀어가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문제를 만났을 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면 불안이 스멀스멀 커지게 된다. 수학만 아니라 삶의 문제를 풀 때도 자꾸 쓰고 그려야 문제가 풀린다. 이런 점에서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라는 말은 여러모로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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