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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Sep 27. 2019

정리정돈에 대한 제2차 정전협정

“으악~ 이게 뭐야? 누가 또 이래 놨어? 이놈에 자식들 사람 새끼로 낳아놨더니 파충류, 갑각류처럼 굴다니…”

주말 아침 아이들 욕실에 들어갔다가 뱀 허물처럼 군데군데 벗어놓은 옷들을 목격한 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분노의 외침이다.

 

큰 아이 방문을 열었다. 온통 늘어놓은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순간 “우리 아이가 병이 있나?” 하는 생각도 아주 살짝 들었다. 정리정돈에 대한 내전의 역사를 말하자면 열이 받다 못해 눈물겹다.

제1차 정전협정의 과정은 이랬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 집은 그야말로 도둑이 든 것 같은 긴장감을 선사했다. 뒤집어진 신발들, 복도 곳곳에 벗어놓은 양말과 책가방, 신발주머니, 겉옷 등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처음엔 따라다니면서 줍고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잔소리도 빠짐없이 해주었다. “너희들 이렇게 살다가 동물처럼 퇴화될 거다. 아빠는 너희를 사육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협박도 했다. 그러다가 안되면 “얘들아 우리 인간답게 좀 살아보자”라고 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생태 습관, 서식지 특성 등을 자상하게 설명도 해줬다. 또한 정리정돈이 무엇인지 아주 쉽게 일러주기도 했다. “정리는 같은 부류의 성질이나 특성을 가진 것들을 한데 모아 질서 있게 만드는 것이고, 정돈은 그런 물건을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정리와 정돈은 함께 해줄 때 그 효과를 보는 거지. 예를 들어, 너희들이 좋아하는 고기를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이렇게 고기별로 정리해놓고 이걸 침대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어? 이불에 핏물이 스미고, 보기에도 살벌해서 별로겠지? 그래서 정리도 중요하지만 정돈까지 해야 정리정돈이 완성되는 거야. 우리 제자리에 좀 갖다 놓아 보자.”라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내전을 겪으며 자기 물건은 자기 방안까지만이라도 넣어 놓는 것으로 첫 번째 정전협정을 합의했다. (여기서 합의는 100% 찬성은 아니지만 발목은 잡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후로 아이들은 합의사항을 이행하려는 우호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문지방을 경계로 책가방, 신발주머니, 문제집, 옷 등이 쌓였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복도에 늘어져 있던 것들이 아이들 방 문지방을 경계로 그 안쪽에 쌓였다는 것뿐이다. 가끔 문지방을 넘어 공동구역을 침범한 옷가지를 볼 때면 깊은 회의감과 분노로 대응사격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아선 제명에 못 죽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뒷일을 맡기고 한동안 의식적으로 아이들 방 쪽으로는 출입을 삼갔다. 확실히 안 보니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종종 아내의 주간 패트롤에 적발되어 몇몇 인형들과 문제집은 폐기처분 되었고, 눈물바람을 동반한 잔소리, 큰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내다 갑자기 적나라하게 까놓은 허물을 보게 되어 그런지 마음속에서 잠자던 분노가 솟구쳤었던 것 같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던 나에게 “당신 그쪽으로 가지 마. 괜히 스트레스만 받고 집안만 시끄러워져…내가 처리할게!”라고 하며 서재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내 서재는 이렇게 된다ㅠㅠ

서재에 앉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재해 있는 책이나 아티클, 각종 핸드아웃과 옷 등이 눈에 띄었다. “하긴 매일 저걸 다 어떻게 정리하면서 살겠어. 저렇게 늘어놓았다가 한 가지 프로젝트가 끝나면 정리하고 그런 거지…”(확실히 인간은 자신에겐 관대하다). 그렇게 입장 바꿔 생각해보다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 방은 건들지 않기로…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사실 아이들 방은 스스로 자정작용이 일어나길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으면 자기들도 치우겠지). 개인의 공간은 자유롭게 사용하되 공동구역(거실, 화장실, 복도)은 자기가 어지른 것에 한해 정리하는 것으로 2차 정전협정을 맺으려 한다. 협상을 관철시킬 땐 뭔가 대의가 필요한 법. 이번 정전협정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도 중요하다는 것을 내세우려고 한다. 정전협정 이후 또 다른 분쟁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순 없지만 이번 협정으로 인해 아이들이 철들 때까지 집안의 평화가 유지되길 바란다.


물론 이것도 나만의 착각일 수 있다. 모 아파트 광고를 보니 이제 좀 있음 문 걸어 잠그고 자기들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후엔 그 방을 비우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겠지. 있을 때 잘해줘야 하나? 아! 자식은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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