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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Oct 04. 2019

좋은 이론 만큼 실용적인 것은 없다

커트 레빈

남 잘되라고 해본 일의 시작은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에게 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그 날도 설비의 작동원리를 작업자에게 교육하고 있었다. 기계설비의 작동을 실습하기 전에 기계의 구조와 동작원리에 대한 이론을 알아야 한다며 나름의 논리로 열심히 설명을 했다. 맨 뒷줄에 한쪽 다리를 책상 밖으로 빼고 앉은 작업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시작부터 강의를 외면한 채 창밖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걸로 봐서 이번 수업에는 영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랬던 그가 30분쯤 지나니 갑자기 손을 들고 말했다.

“강사님, 이론은 현장에 가면 소용없다 아입니까?”

“현장에서 일하는데 이론이 뭐가 필요합니까?”

그의 역동적인 억양이 파헤치고 나간 자리는 극한의 정적으로 메어졌다. 질문인지, 회유인지, 협박인지 당최 알 수 없는 묘한 뉘앙스와 할 말 있으면 말을 해보란 듯한 눈길에 자신이 없어 바닥으로 눈을 떨궜다. 고요함은 사람을 막다른 길로 몰아세운다.


“그래도 이론을 아셔야 설비를 운전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질문도 아니고 대답도 아닌 말이 힘없이 흩어진다.

“이론 몰라도 운전은 잘합니다. 자동차 이론 모른다고 운전 몬 합니꺼?”

도대체 이론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론은 현상에 대한 원리를 정리한 기록이다. 이론은 현상이 작용하는 원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이유와 같이 고정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복잡하고 폭넓은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통해 현재와 연계된 현상(행위)을 보는 렌즈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론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무시하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현상이 아직도 이론화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땅의 번영은 그렇게 쌓아온 이론의 덕을 본 산물이리라. 아이러니하게 그가 이론을 모르고도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시스템도 엄청난 이론의 집합체임을 그는 모를 것이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의 필요성마저 잊게 해주는 좋은 실용을 낳을 때 비로소 좋은 이론으로 거듭난다. 이론은 실용으로 이어지고, 사상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쌓인 실천이 많아질 때 이론의 또 다른 정립은 이루어진다. 즉, 이론은 현실을 뛰어넘게 하고, 현실은 또 다시 이론을 넘어서게 한다.


사족. 이런 생각을 1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하게 된 것이 다행이지만, 그 때 레빈의 말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힘없이 바닥만 바라보지는 않았을 텐데…역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석양이 진 뒤에 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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