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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Oct 04. 2019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합니다

어릴 적 동네 건달 형들에게 돈을 뺏기고 자주보신의 강렬한 의지로 합기도 도장을 찾았다. 등록을 하고 일주일을 낙법만 반복하다 집에 오니 발차기하는 선배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일주일을 구르다 지쳐 그만둔다 하니 사범께서 발차기를 배워도 될 때라고 한다. 마음은 ‘이소룡’인데 다리는 내 것이 아닌 듯 어설프다.


그렇게 몇 달을 도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발을 차 올린 덕분에 제법 모양새도 나오고 허리에 두른 띠의 색깔도 달라졌다. 도장에서 띠의 색깔은 실력과 구력 그리고 위상의 상징이다. 그런 탓에 흰띠로 도장 바닥을 뒹굴다 두 단계 올라 파란띠를 허리에 두르게 되면 은근 자신이 고수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리도 제법 올라가고 앞으로 옆으로, 밑으로 위로 다방면으로 발차기가 가능해진다. 다리를 가만히 두기엔 자신의 실력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때이다.

요즘도 동네에서 태권도든 합기도든 도장에 다니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내 어릴 적과 어쩜 그렇게 같은지…유독 파란띠의 아이들은 보란 듯이 시도 때도 없이 발차기를 허공으로 지르고 다닌다. 그에 반해 검은띠의 아이들은 쉽게 발을 드는 법이 없다. 색깔이 주는 무게 때문인지 표정도 좀 더 단단한 것 같고, 뭔가 내공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무도(武道)라는 큰길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의 모든 일엔 파란띠 시절이 있다. 공부도 일도 삶도. 좀 알게 되면, 좀 해봤다고, 좀 살았다고 쉽게 입을 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나도 해봤다고, 나도 좀 안다고’ 이런 생각이 든다면 우린 분명 허리에 보이지 않는 파란띠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즉,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고, 겪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다는 뜻이리라.


시냇물만 본 사람은 물이 그런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바다를 보고 나면 물이 어떤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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