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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May 10. 2020

아내의 위대함을 알게 된 간병의 시작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였나?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뒤였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폭풍과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머릿속은 전쟁이라도 난 듯 뒤죽박죽이었다. 아버지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장기는 조금씩 제 기능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마음껏 얼굴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중환자실에서는 일반 병실로의 이동만이 그저 내가 바랄 수 있는 희망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애원했던가?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일반 병실로 옮기는 기적이 일어난 그날, 세상은 “이런 희망 너머엔 네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것을 훈계하듯이 나에게 현실을 쏟아부었다. 가장 먼저 맞은 현실은 최종 목적지를 요양병원으로 잡고 있는 아버지 같은 단기 입원 환자를 돌볼 요양보호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일주일의 휴가를 낸 뒤 간병을 시작했다. 병실 한구석에 환자의 자리 잡기를 다 마친 간호사는 나를 불러놓고 말했다. “보호자분, 이제부터 환자분 간병을 하셔야 해요. 소변량 확인하시고, 환자의 호흡에서 그르렁그르렁 소리가 나면 가래를 빼주셔야 돼요. 그리고 이 캔은 환자 식사인데 식사 때마다 1캔에서 1캔 반 정도 콧줄을 통해 공급해 주셔야 해요. 욕창 때문에 2시간에 한 번씩 체위도 바꿔주셔야 돼요. 일단 가래 빼주는 석션부터 알려드릴게요.” 간호사 입에서 쏟아진 두 번째 현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회사는 다닐 수 있을까? 병원비는 얼마나 들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줄줄이 이어진 나를 둘러싼 현실에 ‘암담’이라는 단어의 실재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잘 안되실 수도 있는데 요령 생기면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간호사는 다른 병실로 갔고 이제 다음 차례가 오면 난생 처음 하는 간병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긴 시간의 수술과 2군데 병원의 중환자실을 이동하는 동안 줄곧 병원으로 오고 가기를 반복했지만 그건 정확히 말해 문병이었지 간병이 아니었다. 모든 간병 행위는 중환자실 간호사들에 의해 처리됐고, 나는 그저 정해진 면회 시간에 맞춰 와서 아무 말도 없는 아버지 옆에서 그저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넘겨주다 가는 게 전부였다.


한동안 아버지 침대 옆으로 어깨 폭에 딱 맞춘 듯한 너비의 보호자 침상을 빼고 아내와 앉아 있다 그르렁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섰다. 간호사가 말해주고 간 바로 그 신호가 점점 잦아졌다. 아내의 도움으로 어설프지만 첫 석션을 마치고 증류수에 호스를 씻고 나니 아내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기저귀를 살짝 들쳐보니 아내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난감하기도 하고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표현을 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이 머릿속에, 그리고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표현이 이 시점에 맞는지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감정들 속에서 잡아낸 한 가닥 생각에 용기를 냈다. “해야 된다. 내가 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피덩이였을 때 여기 누워 아무 말 없는 이분은 기쁨으로 내 밑을 닦아줬을 것이다.” 마음은 먹었지만 행위는 마음보다 한 수 위의 현실이었다. 눈과 코를 자극하는 생경한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미숙함이 합쳐져 난리가 벌어졌다. 그때 조심스럽게 다가온 아내가 말했다. “내가 아버님 좀 봐 드려도 될까?”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나의 어려움이자 아버지의 어려움, 그러니까 우리 부자의 공동의 어려움에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왜 아내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못했을까?”라는 자책과 함께 “며느리는 자식 아닌가? 당신은 나와 아버지에게 차고 넘치는 사람이야. 아버지 좀 도와드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옆으로 밀려난 나와는 달리 아내는 아버지의 어려움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그런 후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애들 기저귀 한 번을 갈아 봤어야지. 이렇게 애들 한 번도 안 봐준 티를 낸다니까”. 이 한 번의 말과 행동은 우리 부자에게 있어 현재의 아픔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어려움까지 한 번에 걷어내 버린 고귀하고 위대한 걸음이었다. 이 한 걸음을 통해 나는 참된 가족의 의미, 가족이 가족에게 보여주어야 할 사랑의 모습을 배우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6개월 후인 2011년 12월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저보다 더 서글프게 울며 고백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버님, 제가 더 잘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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