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효과를 인정하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돼버린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했던 말을 세네카가 라틴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정치를 사회라고 고쳐 쓰면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세네카의 말이 있기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개인인 동시에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 살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이 코로나 19 사태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의 영향은 나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Individual)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존엄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것에 천착하고 편안하고 근시안적인 것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아이러니하게 개인을 타인의 존재로부터 격리시키고 스스로의 존엄을 외면하게 했다.
노자는 “세계는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즉, ‘나’라는 존재는 ‘나’의 본질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로 인해 ‘나’도 존재한다는 상대적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I and Thou』라는 책에서 마틴 부버도 ‘나’와 ‘너’는 서로 붙어 있는 쌍생아이며, 개인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관계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살았던 시대와 지역은 극적으로 달랐지만, 이 두 사상가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환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방된 시스템 그 자체이다. 물론 세상 안에 살고 있는 개인도 매 순간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개인이 아무리 완전한 존재라고 한들 개인 하나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에게 타인은 또 다른 ‘나’이며 또 다른 ‘너’이다. 그렇지 않다면 톰 행크스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굳이 ‘윌슨’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윌슨과 교감한다. 이야기를 하고 화를 내고, 질문도 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가 무인도에서 윌슨을 만든 건 살기 위해, 자신의 존재의 완성을 위해, 그가 홀로는 이룰 수 없는 그 어떤 존재감을 위해서다.
관계의 온전함은 자신을 찾고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곧 관계의 단절은 힘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너’가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때 그 안에 ‘나’의 가능성이 만들어지고 ‘나’의 쓸모가 생성된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에서도 적용된다. 가르침과 배움은 낱개가 아닌 서로의 관계로 온전한 힘을 발휘한다. 읽기와 쓰기도 마찬가지다. 일찍부터 위대한 선각자들은 이를 깨닫고 실천했다. 가르치는 동시에 배웠으며, 읽는 동시에 써 내려갔다.
우리의 근시안적인 사고와 안일함으로 인해 타인의 존재를 외면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면 우리는 그저 동물 일반에 편입될 뿐이다.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할 수 없어 환경에 의존해 명운을 연명하는 그 길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초연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 고유의 존재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길은 우리의 존재가 ‘타인의 효과’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