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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May 17. 2020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재발견 ①

 주인공의 자아확장과 새로운 역할 창조 과정

오랜만에 생긴 연휴를 맞아 오래전부터 시간 나면 보겠다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정주행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많지만 한일병합 이전에 이름도 없이 조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물은 많지 않기에 관심이 끌렸다. 물론 화려한 캐스팅과 예고편 영상도 구미를 당기는데 한몫했다. 친일을 미화했느니, 역사를 왜곡했느니 하는 비판도 있었지만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의 생각은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주인공이 타인을 통해 겪는 자아의 확장 과정과 다른 하나는 격변의 시대 교육의 역할이다. 4일 동안 23편이라는 드라마 감상을 마친 후 기록했던 생각을 연재로 올리려고 한다. 이번 편은 ‘자아 확장’ 편이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드라마 내내 반복되는 내레이션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지가 개벽할 만큼 이 땅은 변했지만 저 말만은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마치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뿐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드라마는 5명의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노비의 자식으로 주인집 양반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어머니가 노리개로 농락당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잃게 되는 유진 초이(이병헌),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무신회 낭인이 된 구동매(유연석), 사대부 영애로 살지만 갓난아이 때 일제 저항운동을 하던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애신(김태리), 만석꾼 가문의 자손이나 조부와 부친의 파렴치한 과오에 부끄러워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식인 김희성(변요한), 출세에 눈이 먼 아버지 이완익(김의성)에게 이용당하고 일본 갑부 노인에 팔려 시집가 빈관(호텔) 사장이 된 쿠도 히나(이민정)로 이들 모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애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에게 고통과 슬픔의 기억을 심어준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을 기르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구동매는 일본으로 건너가 무신회 한성 지부장이 되어 돌아오고, 유진 초이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미 해병대에 지원해 군인이 되고 전과를 세워 대위로 조선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내가 뭔가를 하게 되면 그건 조선을 망하게 하는 쪽으로 걸을 테니까”


유진 초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자들이다. 이들의 힘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애신이라는 한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아의 변화를 겪는다.


“그건 왜 하는 거요? 조선을 구하는 거”
“꼴은 이래도 500년을 이어져온 나라요. 그 500년 동안 왜란, 호란 많이도 겪었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지 않았겠소. 그런 조선이 평화롭게 찢어발겨지고 있소. 나라 꼴이 이런데 누군가는 싸워야 하지 않겠소.”
“그게 왜 당신인지 묻는 거요.”
“왜 나면 안 되는 거요? 혹시 나를 걱정하는 거면…”
“내 걱정을 하는 거요.”


고애신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힘을 쓰는 자를 새에 빗대어 꾸짖는다.

“내일은 비가 올 모양이오. 새들이 저리 낮게 나는 걸 보니.”


이로써 그들은 사대부 영애로 수나 놓으면서 꽃같이 살다가도 될 것 같은 고애신의 의병 활동을 보며 변혁적 학습(혹은 전환 학습)을 하게 된다. 이제 그들 속에는 지금까지 만들고 쏟아부어 키워왔던 그릇이 아닌 또 다른 텅 빈 그릇이 생겨났다. 새로운 자아 인식이며, 타인으로 또 조선으로의 자아 확장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시 정립했다. 무신회 낭인, 미 해병대 대위, 룸펜(무위적 지식인), 빈관 사장이라는 주어진 역할에서 나아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전환하고, 타인의 숨겨진 아픔과 열망을 위한 새로운 역할을 창안하게 된다.


드라마의 특성상 고애신에 대한 사랑하는 감정이 매개체가 되지만 23편의 드라마 속에는 이들의 자아가 개인의 복수와 영달에서 타인으로, 또 조선으로 확장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직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우리에게도 두 개의 역할이 있다. 주어진 역할과 창안된 역할이다. 주어진 역할은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 자체의 요구나 일상적 요구이다. 내가 쓴 역할이 아니라 주어진 매뉴얼과 목표에 따라야 하는 대행자의 역할이다.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무질서로 무너질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역할 속에서도 우리가 스스로 쓸 수 있는 사명과 목적, 삶의 의미를 헤아리고 타인의 요구에 숨겨진 상처와 열망을 읽어 또 하나의 역할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진 매뉴얼에 의존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행위해야 하는 루틴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속한 조직이 얼마나 더 큰지, 얼마나 더 무탈하게 돌아가는지에만 매몰될 뿐이다.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면 직(職)을 따를 수는 있으나 업(業)을 따를 수는 없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원한다면 스스로 역할을 창안해야 한다. 직장을 나와야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역할을 창안할 수 있는 사람은 직장 밖이든 안이든 자신의 삶을 살고 타인도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윈-윈 기버(Win-Win Giver)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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