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9월호 추석>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9월호 주제는 '추석'입니다.
"엄마, 왜 남자들만 절해?"
이상했다. 제사 며칠 전부터 식재료를 사러 새벽시장과 축협을 드나들고, 제사 전날까지 작은 엄마와 연락하며 스케줄을 조정해서 열심히 음식을 만든 건 엄마와 작은 엄마였다. 그런데 제사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그 위 조상님들께 안부를 묻는 건 남자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래도 추석이 좋았다. 평소엔 배달을 하느라 편안한 복장이던 (송승헌을 닮은) 아빠가, 추석이 되면 칼주름 잡힌 정장 바지에 미색 셔츠를 차려입은 모습이 멋져 보였다. 제사 전 날 티브이 앞에 앉아 진지하게 지방을 쓰는 아빠 옆에 앉아, '이 분은 누구야?' 물어보고 나와 핏줄이 섞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없던 가족애가 생기기도 했다.
제사상 앞에 피어오르는 매캐한 향 냄새, 엄마가 손에 들려준 제사음식을 공손히 아빠에게 전달하며 나도 제법 의젓해진 느낌, 제사를 마친 후 다 함께 둘러앉아 먹는 아침 식사, 거기에 친척 어른들이 건네는 용돈까지.
어린 시절, 추석은 경건하고 즐겁고 맛있는 날이었다.
"정아야, 숟가락 하나 가득 떠서 동그란 모양으로 올린 다음에 요렇게 익으면 이렇게 딱 뒤집어."
중학생이 되어 손이 야무져지기 시작하면서, 추석의 의미가 달라졌다. 손가네 집안의 어엿한 '여성 일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전만 뒤집었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이쯤이다. 물론 나물을 무치거나 거대한 생선을 찌고 굽는 일은 할 수 없기에 단순 작업인 콩나물 대가리 따기(대가리를 딴다니 상당히 야만스럽군), 무 깍둑썰기, 당근, 양파 등 야채 썰기, 동태 전, 동그랑땡, 각종 튀김류를 담당하는 보조가 되었다.
하루 종일 기름과 싸워야 하기에, 방바닥을 신문지로 메우고 전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다 보면 하루가 갔다. 소쿠리에 쌓인 전과 튀김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날라치면 어린 나이에도 '아이구,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추석 당일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성묘 같던 남자들이 '이제 출발한다'라고 전화를 하면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여기서 '남자들'이라고 한 이유는, 언젠가부터-아마도 내가 전을 뒤집기 시작한 시점부터일 것이다-남자 '어른'들뿐만 아니라 내 또래 남자 '아이들'도 성묘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랑 동갑 그리고 네 살 위 남자 사촌들은 남자 무리에 속해 산을 타고 성묘를 했다. 그러는 동안 비슷한 나이인 나와 언니는 여자 무리에 속해 집에서 음식을 했다. (이거 뭐지? 나도 산 잘 타고 절도 잘하는데?!)
남자들이 도착해서 제사를 지낼 때도 풍경은 달라졌다. 남자 아이들이 남자 어른들과 같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사상 앞에서 경건히 두 손을 모으고 상이 차려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언니와 나는 분주히 음식을 날랐다. 그리고 남자들의 절이 끝나면 여자 아이들이 절을 했다. 신기한 것은 여자 '아이'들만 절을 했다는 것이다. 마치 여자지만, '아이'니까 특별히 허락됐다는 듯. 며느리들은 절을 안 했다. 지금 생각해도 묘한 장면이다.
청소년 시절, 추석은 보이지 않는 자들의 노동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제사가 끝난 뒤 즐기는 음식, 용돈이 주는 쾌락에 묘한 언짢음은 흐려졌다. 일 년에 두 번만 참으면 되니까.
"아가야, 첫 명절이니까 한복 입어야 한다."
"네? 한복이요?"
"그럼, 그럼. 우리 조상님께 이쁜 아기 인사드리는 날인데 한복 입어야지."
"아, 네. 어머니~~."
결혼하고 얼마 후가 구정이었다. 평소 조상님 모시기를 하늘처럼 하시는 시어머니기에 걱정은 했다만, 한복이라니.
양가 모두 형편이 좋지 못해, 결혼할 때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했던 우리다.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간병하느라 한창 일할 나이를 병원에서 보낸 신랑은 당연히 돈이 없었고, 교사가 된 것은 좋지만 경기도와 부산으로 찢어져 장거리 연애 비용을 모두 부담했던 나 역시 돈이 없었다.
신혼집은 나의 자취방이었고, 신혼살림도 내가 자취할 때 쓰던 것이었다. 혼수가 뭔지도 모르고 결혼 예물도, 결혼사진도 없는 우리다. 꼭 필요한 냉장고와 TV만 구입하고, 신혼여행에 돈을 몰빵한 신혼부부에게 한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분명 시어머니도 그 사실을 아실터라 서운한 마음이 살짝 올라왔으나, '그래, 그러실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언니에게 SOS를 했다.
6시간이 넘는 귀성 전쟁을 치르고, 친정에 들러 재빨리 한복을 입수한 뒤 시댁에 갔다. 그리고 이어진 노동의 현장.
시어머니와 장 보기는 마치 슈퍼 마리오가 점프를 하며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뛰어야 했다. 생선은 새벽 시장의 00수산, 떡은 중앙 시장 ㅁㅁ떡집, 과일은 오랫동안 거래한 XX청과. 지루하니 더 나열하지 않겠다. 다들 아시지 않나? 어머니들은 자기만의 거래처가 있다. 그리고 꼭! 그곳에서 사야 한다.
한바탕 장 보기 전쟁이 끝난 뒤, 전 뒤집기 시간이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시댁은 친척이 없어서 시아버지와 신랑 모두 노동의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식재료를 손질하면, 보조 셋은 머리를 맞대고 허리를 구부린 채 신중히 작업에 임했다. (시간이 흐르고...) 알 수 없는 표정의 신랑, 뿌듯한 표정의 시아버지,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복잡한 나는 수북이 쌓인 제사 음식을 뒤로하고 추석 전야를 마무리했다.
"아가야, 이제 한복 갈아입고 와. 제사 지내자."
"네, 어머니~~."
추석 당일 아침, 제사상이 얼추 차려지자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불편했다. 일단 짧으니까. (언니, 미안!) 손목 언저리도 오지 않는 노란색 저고리, 정강이에 댕강거리는 분홍빛 치마를 애써 끌어내리며 제사상 앞으로 갔다. 신랑 역시 날씬이 시절 사놓았던 정장을 입고 불편한 기색으로 제사상 앞에 섰다. (미안하지만, 절 하다가 바지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남(?)의 집 제사는 처음 목격했다. 시아버지와 신랑이 절을 하고, 익히 아는 수순에 따라 차례를 지내겠거니 했다. 그런데 뭔가 어설펐다. 친정에서 보던 능숙한 전개는 없고,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우왕좌왕했다. 차례 순서를 놓고 이게 먼저다 저게 먼저다 설왕설래하기도 했다.
잉, 뭐지? 시어머니는 조상님 모시기를 하늘같이 하시는 분인데?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남자들의 차례 의식이 끝난 뒤, 신혼부부가 절을 올렸다. 어디의, 누구에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했다. '조상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무언가를 빌었던 것도 같다. 그것으로 차례는 끝이 났다. 가장 많은 노동력을 투입한 시어머니(조상님들의 며느리)는 절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으레 그러하듯 친척들을 맞이하고 분주히 움직였다. 댕강거리는 저고리와 넓게 퍼진 한복 치마에 앞치마를 두르고 상을 차리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후식을 먹기 위해 상을 차리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손님을 맞는 것을 행복해했고, 나는 웃고 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이 불편한 한복을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하나? 친정에 가는 적절한 타이밍은 언제인가? 손님들이 가야 갈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가는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신랑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시어머니는 '새아기 보러 또다른 친척 어른이 오시기로 했다'며 아쉬워하셨지만, 신랑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혜정이 부모님은 어제부터 기다리고 계셨다'며 단칼에 잘랐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신랑은 시댁에 도착했을 때부터 내 분신처럼 옆을 지켰으며 음식을 하고, 상을 차리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할 때 함께 했으니까. 평소에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는 착한 신랑이니까. 신랑을 생각하면 일 년에 한두 번은 웃으며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절, 맛있는 음식과 용돈을 여성의 노동과 맞 바꿨듯이.
"아~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역시 우리 집 제사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밀린 얘기를 나눴다. 손가네가 인정한 개그맨인 나는 '참한 새아기'를 벗어던지고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썰을 풀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신랑은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좋았다. 신랑도 내가 진짜 웃는 것을 보며 시댁에서 보지 못했던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신랑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평화가 깨졌다.
"여보세요, 어. 뭐라고? 지금?"
시어머니께 온 전화였다. 새아기를 보러 온다던 또다른 친척 어른,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를 그 친척 어른이 도착했으니 다시 와서 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친정에 온지 한 시간도 안되서였다. 시댁과 우리 집이 차로 10분 거리라 그런 건가 싶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무리 새아기가 이뻐서 자랑하고 싶어도, 친정에 간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납득이 안됐다.
맘 좋은 우리 부모님은 잠시 다녀오라며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잠시가 정말 잠시일까? 나는 또 음식을 내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후식을 내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 뒤 저녁이나 돼야 우리 엄마 아빠와 재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일 아침이면 엄마 아빠와 헤어져야 하는데...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와중에 한복을 입고 가야하나 고민하는 내가 어의없었다.
"아니, 혜정이 집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행일까. 평소 합리적 개인주의를 자처하는, 그래서 아무리 가족이라도 합리적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신랑이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틀 동안 함께 명절을 겪으며 참고 있던 것이 터진 듯했다. 평소에도 명절을 못마땅해하던 사람이었다. 구시대의 관행을 버리고 가족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시간으로 명절이 재정립되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6시간을 꼬박 운전하고 내려와, 가족 간 화합의 시간은커녕 얼굴도 본 적없는 조상님들을 위한 노동에 던져졌으니 화가 났나 보다. 나는 나대로 신랑은 신랑데로 화가 단단히 난 명절이었다. 이쁜 새아기를 친척 어른들께 자랑하고 싶은 시어머니의 선의(?)는, 이틀 동안 쌓였던 묘한 감정들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었고 첫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집에 돌아 오는 길, 6시간인가 8시간인가 내도록 싸웠다. 귀경 전쟁과 부부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됐다. 꽉 막힌 도로만큼 마음도 꽉 막혔다. 차가 안 막혔다면 덜 싸웠을까? 아, 사실은 싸웠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의 일방적인 공격이었으므로.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략 이런 공격을 퍼부었던 것 같다. (잠시 뒤 격정적인 말이 나오니 명절 증후군이 있거나 심신 미약자는 한 문단 건너뛰시길.)
'나는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얼굴도 모르는, 나한테 해준 거 하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절을 하고, 손님 대접을 해야 하나? 남자인 당신은 우리 집에 오면 손님 대접을 받는데, 나는 왜 대접하는 사람이 돼야 하나? 왜 나는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곳에 가는 것에 눈치를 봐야 하나? 왜 남자 집에 먼저 가고, 여자 집은 나중에 가나? 우리 둘 다 부모님의 소중한 자식인데 각자 집에 가는 게 맞지 않나?'
무려 6시간이면 아주 많은 말을 했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 격이라 신랑에게 미안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우리를 옥죄었던 뿌리깊은 가부장제와 변질된 유교 문화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고 아군에게 총질을 해댔다. 어디라도 하소연하고 싶었나 보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언제 싸웠냐는 듯 다정한 부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몇 번의 명절을 더 겪으면서, 나는 점점 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신랑은 비합리적인 전통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그리고 어느 날, 신랑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명절에 안 내려가기로 했어. 나 차 막히는 거 싫어하잖아. 명절 전에 내려가서 인사드릴 거야."
차가 막혀서 안 내려간다고? 신랑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 가는 선택이지만, 이상하다 싶어 계속 캐물으니 신랑과 시어머니 사이에 오랫동안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신랑은 어머니 연세도 있고, 우리 부부도 힘들게 내려가서 음식하고 제사만 지내다 오는 것이 힘드니 제사를 절에 올리고 함께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니자고 얘기를 했단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조상님 모시는 중한 일을 어떻게 그만두냐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제사는 포기 못한다고 하셨단다. 조상님들 덕에 별 탈없이 사는 거라며, 본인이라도 가족을 위해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시어머니의 말씀에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명절에 놀러 다닌다니까!'라고 버럭 했을 신랑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최 씨 고집의 본보기인 신랑이었기에, 타협이 안되었구나를 직감했다. 마음 한 켠에선 오호라, 잘됐다! 생각도 했다. 별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 처리해 주니, 나야 감사하지.
"이번 추석에는 어디로 여행 갈까요?"
요즘 우리 부부의 명절 모습이다. 명절은 가족 간의 사랑을 돈독히 하는 날이라는 의미에 충실하며 여행을 떠난다. 드디어 가족 여행을 떠나는 해피엔딩이 되었냐고? 아니다. 아쉽게도 이 가족 여행에서 가족은 우리 부부만 해당한다.
처음에는 명절 전에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명절에 어르신들끼리만 제사를 준비하는 것이 힘드시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자식과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제사만 지내지 않는 것은 소심한 반항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함께하는 것과 상관없이, 마음을 다해 조상님께 드릴 음식을 만들고 가족들의 평안을 비는 의식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신랑도 더 이상 제사를 절에 올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각자에게 중요한 것을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합의가 됐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명절은 일 년에 두 번 주어지는 긴 휴식'이라 재정의하고, 우리 가족만의 행복한 일정을 보낸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똑같다. 어린 시절, 여성의 노동을 맛있는 음식과 용돈으로 퉁쳐왔듯이, 달콤한 휴가에 눈이 멀어 풍성한 명절 뒤에 숨은 부조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나에게 추석은 즐거운듯 불편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