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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혜정 Sep 23. 2024

앞선 사람이 준 용기 "펜을 들었으면 뭐라도 쓰세요."

나의 걸음이 길이 된다면

그날도 긍정님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러 가는 길이었다. 벌여 놓은 일이란 책 쓰기 특강. 그렇다면 나는 책 쓰기에 관심이 있느냐. 놉! 글쓰기는 관심 있어도 책 쓰기는 나와 먼 일로 여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긍정님이 강림했을 때의 나는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 배우고 경험한다. 얍얍!' 아니던가. 과거의 어느 날도 긍정님이 오셨는지, 자경노 톡방에 올라온 책 쓰기 특강을 순식간에 신청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책 쓰기 특강이 다가올 때의 나는 무기력님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왜 또 신청한 걸까, 그 먼 길을 어떻게 갈까, 지금 취소하면 운영진 분들이 힘들겠지'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온라인도 아닌 오프라인. 차 타고 지하철을 환승해 서울역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게다가 갑자기 보슬비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무기력님을 업고 힘겹게 강연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느즈막이 도착해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강연장은 웃음소리와 긍정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강연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강연자는 자경노 운영진이자 <오늘도 교사로 걷는 당신에게>의 저자 배정화 선생님이었다. (이하 배 작가님)



배 작가님은 베테랑 교사답게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화법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연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급의 내용과 구성으로 박수와 감탄을 자아냈다. 덕분에 무기력님으로 늘어졌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에너지 부스터를 마신 것처럼 정신이 또이또이해 졌다. 책 쓰기에 필요한 실무적인 내용과 더불어 동기부여가 되는 쓴소리도 가득했다. 



"작가는 애쓴 자, 견딘 자, 해낸 자에요." 배 작가님은 '매일 글쓰기'를 원칙이 아니라 '철칙'으로 정해 두었다고 했다. 방학을 이용해 글을 쓰면서 한 편의 글이 완성되지 않으면 '외출 금지'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해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못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며, 쓰기로 했으면 시간 핑계를 대지 말라고 했다. 초고는 방학 때 썼지만, 길고 긴 퇴고는 학기 중에 이루어졌기에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잠과 시력, 머리카락을 포기했단다. 그러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죠. 그죠? 펜을 들었으니 뭐라도 쓰세요."



'헉! 나한테 하는 말인가?'



펜을 들고 있던 나의 손은 노트 위에 한 문장을 써 내렸다. '펜을 들었으니 뭐라도 쓰자. 뭐라도.'







"오글오글 공저 써볼까요?"



강연이 끝난 뒤였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오글오글 회원들이 강연이 끝난 후 번개 모임을 하는 자리였다. 올해 초 개인 저서를 출간하신 A 선생님이 운을 땠고, 옆에 있던 B 선생님이 웃으며 맞받았다.



"그러게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죠!"

"하하하!"



테이블 세 개를 이어 붙여 둥그렇게 마주 앉은 사람들 사이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조금 전 강연에서 긍정 에너지를 듬뿍 받은 터였다. 혼자서는 '내 글을 누가 읽어 주겠어,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앞 선 사람이 준 용기 덕분에 '할 수 있다!'로 생각이 변했다. 



게다가 함께이지 않은가? 혼자서는 겁이 나지만, 함께하니 용기가 났다. 어딘가에서 나와 함께 글을 쓰는 사람 있다는 실제감, 다이어리에 기록될 마감 날짜, 첫 독자이자 편집자가 되어줄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해맑았던 수다 시간이 제법 진지한 회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랜 논의 끝에 아래와 같은 회의 결과가 정리됐다. 집에 오는 길, 비는 그쳤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4월 번개에서, 의기투합한 결과 탄생한 첫 회의록







"15킬로미터. 재밌었다!"



애플워치에 표시된 등산 거리를 확인하며 뿌듯하게 웃었다. 장시간 등산 뒤, 낯선 마을로 하산해 포장도로와 호수 산책로를 거쳐 출발 지점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핸드폰에 찍힌 2만 8천보의 걸음 수가 발 뒤꿈치가 땅기는 이유를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 등산도 쉽지 않았다. 고생 길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익히 알려진 등산로가 아닌, 비선호 등산로를 조합해 산을 한 바퀴 크게 도는 루트를 만들어 등산한다. 남들과 다른 길, 낯설지만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메인 등산 코스보다 시간도 노력도 더 들 수밖에 없다.



비선호 등산로는 등산 안내도 또는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으나, 등산 난이도, 소요 시간, 교통 등의 이유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을 말한다. 비선호 등산로에선 길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람이 왕래해야 풀이 밟히고 흙이 다져져 눈에 보이는 길이 생긴다. 하지만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곳은 다시 풀이 자라나고, 흙이 풀에 가려져 길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야 풀이 기울고, 길인가 싶은 방향성이 생긴다.



오늘도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릴 때마다 사방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풀을 보면서 "여기가 길인 듯?!"을 수십 번 외쳤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낯선 마을에 당도했다. 드디어 하산했다는 기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하다 못난이도 이런 못난이가 있나 싶은 채소들과 대추 알이 섞여 있는 무인 가판대를 만났다. 



'몽땅 다 5,000 입니다. 감사 합  니다' 찢어진 종이에 삐뚤빼뚤 눌러써진 글을 보며 '아, 여기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구나' 생각했다. 하얀 마대 자루를 잘라 돌멩이로 모서리를 고정한 가판대를 기억하고 싶어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까. 나무로 얼기설기 엮인 평상 위에 알로에를 닮은 식물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말리고 있는 건가? 이 식물의 이름은 뭘까?" 이야기하고 있는데, 신랑이 말했다. "저기 구석에 계좌 번호 적혀있어. 여기도 무인 상점이네. 역시 무인 상점이 대세구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와, 너무 재밌다. 이 길로 오기 잘했다!" 이 기억도 놓치지 싫어 핸드폰에 담았다. 그렇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풍경을 즐기며, 앞 서 걸어가며 길을 알려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내 발자국도 길이 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무성한 수풀에 가려진 희미한 길이 보였다. 나의 발자국이 길이 되기엔 작고 조심스러웠나 보다. 그래도 호기심 많고 눈 밝은 등산객에겐 이 길이 보이겠지? 그 길을 찾는 누군가가 너무 많이 헤매지 않길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가면 시원한 막걸리와 매콤한 오징어 볶음, 바삭한 부추전이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4월의 어느 날, 서울역 근처 회의실에서 교사이자 작가인 배정화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오글오글의 공저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배 작가님도 열심히 길을 밟아 가고 있을 때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걸어간 길이 누군가에게 방향을 알려주리라는 것을. 목적지에 도착 해 돌아보니 많이 힘들었고, 헤매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뒤를 따라올 사람들의 힘을 덜어 주고자 강연에 나섰을 것이다.



나 또한 작은 발걸음이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기록해 두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연재를 시작했다. '내 글을 누가 읽어 줄까, 내가 책을 써도 될까, 일단 쓰고는 있는데 이제 무얼 해야 하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글오글의 좌충우돌 공저 작업을 함께 따라와 주면 좋겠다. 



오글오글 멤버들도 초행길이라, 앞 선 사람의 흔적을 더듬으며 헤매고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풀은 더 깊이 누울 것이고 흙은 더 단단하게 밟힐 것을 믿는다. 그러니 나처럼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어? 여기도 길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가볼까?' 용기 내어 따라와 준다면 참 기쁘겠다. 




*서두에서 언급한 강연 내용이 궁금하다면 오글오글의 후기 여왕이 쓴 글을 참고하세요. 



몽땅 다 5,000 입니다. 감사 합  니  다
낯선 길에서 만난 두 번째 무인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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