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10월호 독서의 계절>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0월호 주제는 '독서의 계절'입니다.
500에 30.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신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아파트 상가 건물 2층에 매물이 나왔다. 9평. 이 동네에서 이 가격의 매물은 찾기 어렵다. 아니, 어느 동네에 가도 찾기 어려운 가격이다. 마음이 심란했다. 당장 가서 물건을 살펴봐야 하나 초조했다. 남은 휴직기간 5개월. 결정을 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결정. 인생 항로를 바꿀 수도 있는 결정. 그랬기에 최근 술로 밤을 적시는 날이 많았다.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던 오랜 꿈을 실천하느냐, 최근 들어온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기존 커리어를 이어 가느냐. 현재 상황에선 둘 다 도전적인 일이기에 선택이 쉽지 않아 머리를 싸매던 참이었다. 그런데, 500에 30이면 밑져야 본전 아닌가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거기는 '그곳'이 있는 곳 아닌가.
'그곳'은 내 단골 술집이다. 홍콩의 어느 뒷골목에서 봤던 오래된 식당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술집은,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곳이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현지 음식에 반해 인생의 진로를 틀어 버린 사장님이 있는 곳. 중심 상권에서 떨어져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줄을 서게 만드는 실력자가 있는 곳.
자신의 꿈을 위해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결국 성공한 사람. 내가 꿈꾸는 삶을 사는 이가 주인장으로 있는 곳인 것이다.
이곳의 단골로 오가면서 건물을 유심히 보긴 했었다. 높이 솟아 반짝이는 아파트와 상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궁금한 3층 짜리 건물. 사장님은 빈티지한 가게 콘셉트와 딱 맞아떨어져서 이 건물을 택한 것일까, 저렴해서 택한 것일까 궁금했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심 상가나 번듯한 건물에 있었다면, 이 인테리어는 인위적으로 느껴졌을 거야.' 언제나 초긍정 마인드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래되었기에,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 곳들이 있다. 동네 책방도 그러하다.
오래된 동네, 뒷골목 어딘가와 어울리는 독립 서점 혹은 동네 책방. 사실 그들이 오래된 동네나 뒷골목 어딘가에서 책을 팔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임대료가 저렴해서. 15,000원짜리 책을 한 권 팔면 책방에 남는 수익은 공급률에 따라 3,000~4,500원 정도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처럼 10% 할인을 적용하면 1,500~3,000원이 남고, 5% 적립을 해주면 750~2,250원이 남는다. 거기에 임대료, 관리비, 시설 유지비, 세금 등을 제하면? 인건비는 고사하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인터넷 서점은 애초에 싼 가격에 책을 매입한다. 자연히 마진폭이 높다. 그러한 가운데 도서정가제가 허용하는 10%까지 할인을 허용하고 5% 적립까지 용인하기 때문에 구매가 몰릴 수밖에 없다. 소규모 서점이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과 같은 할인가로 책을 팔면 굶어 죽기 딱 좋다. 동네 서점은 이보다 높은 가격에 책을 매입한다. 마진이 20~30% 수준이다. 시집 한 권에 정가가 8천 원 정도니까, 한 권 팔 때 1,600원 남는다. 10% 할인을 적용한다면 한 권에 800원이 남는 거고, 5% 적립까지 하고 나면 한 권에 딱 400원이 남는다. 카드 수수료는 별도다. 장사하면 안 되는 구조다. 자선사업에 가깝니다.
-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중
물론 일부 책방은 독특한 콘셉트와 탁월한 큐레이션 등으로 단단하게 터전을 일궈나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방이 책만 팔아서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식음료를 함께 팔거나, 각종 모임과 클래스를 열고 심지어 책방지기가 투잡을 뛰며 유지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나 또한 책방이나, 출판사만 해서는 지금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억지로라도 커피를 배우고 투잡을 뛰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책을 사는 사람이 유물 같은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 그리고 출판사 창업을 꿈꾸는 스스로를 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나는 왜 이리 돈 안 되는 일만 좋아할까? 아니, 나는 왜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 걸까?
책은 나의 생명 유지 장치다. 오랫동안 무기력과 번아웃에 시달리면서 찾은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삶의 길을 찾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다. 고갈됐던 에너지를 채웠고, 희로애락을 되찾았다. 그래서 동네 구석구석, 책방을 찾아다니는 일은 꺼져가는 심장을 일깨우는 심폐소생술과 같았다. 나도 언젠가 이런 공간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다.
동네 책방은 대형 서점과 도서관에서 맛볼 수 없는 재미를 준다. 하루에도 수 천권씩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책방지기의 선택을 받은 책들이 정성스럽게 꽂힌 서가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꿀잼이다. 책 표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당당하게 누워있는 책이든, 서가 한 구석에 꽂혀 수줍게 책등을 보이고 있는 책이든 한 권 한 권에 다정한 눈길이 간다. 그 한 권 한 권에 책방지기의 취향과 시선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다.
큐레이션이 잘 된 책방에선 마음속이 바쁘다. 생각 같아선 모두 담아가고 싶지만, 집에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기에 마음속으로 8강전, 4강전, 준결승전까지 치열하게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에 들린 책을 계산하고 커피를 주문해 따끈따끈한 책을 읽노라면 얼어있던 마음이 포근포근해지곤 했다. 손님 한 명 한 명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책방지기님들을 볼 때면, 세상이 말하는 길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됐다.
그러다 문득, 읽고 있던 책장이 덮일 때까지 한 번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식어버린 커피처럼 마음도 다시 차가워지곤 했다. 그와는 반대로 뜨거워지는 눈을 꿈벅거리다가 무거운 마음과 책을 안고 책방을 나설 때면 혼자서 조용히 말하곤 했다. '오래오래 문 열어 주세요.'
500에 30.
그 숫자를 보고 며칠간 잠을 못 이뤘다. '이 공간을 내 취향이 가득 담긴 책으로 채우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 모임을 하자. 글쓰기 모임 장소로 쓰면 정말 좋겠다. 4일은 문을 열고 3일은 문을 닫아야지. 3일 동안은 출판사 일을 해야겠어. 친환경 소재 가구를 쓰면 더 의미 있겠지. 작가와의 만남을 하려면 빔프로젝트와 간이 의자도 마련해 둬야겠어.'
순식간에 후루룩 그려지는 그림은,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자료 조사를 했던 것이 합쳐진 것이었다. 오랫동안 생생하게 그려와서 너무도 익숙한 그림이었다. 그러다 '인구수가 얼마 안 되네. 교통도 불편해. 인테리어 비용은 이 정도 들겠지. 가구, 책 구입 비용은…'
몇 년을 반복했던 계산이건만. 몇 년째 같은 결론이건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애정하던 책방들, 나중에 가봐야지 저장해 둔 책방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은 것이 생각났다. 블로그, 브런치에 올라오던 책방 일지들이 1, 2년 전 날짜를 마지막으로 뚝 끊겼던 것이 떠올랐다. 아직까진 내 공간을 갖는 것에 욕심두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해 보자던 다짐을 상기했다.
그렇다. 꿈은 꿈일 때 가장 아름답고, 그렇기에 '언젠가'라는 그럴듯한 말로 미뤄두는 것이 편안하다. '언젠가 할 거니까.'
그러다가 울컥.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면서 사실은 꿈을 이뤄내길 미루는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났다. 파랗고 말간 가을 하늘도 원망스러웠다. 독서의 계절이라더니, 독서하는 사람들이 대체 어딨냐고 묻고 싶었다. 책 읽는 사람이 많았다면, 책을 사는 사람이 많다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겠냐고 따지고 싶었다. 사실은 용기가 없어서 시작하지 못하는 거면서 애꿎은 가을 하늘에 소리 없는 고함을 치고 있었다.
“독서의 계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