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12월호 2024년을 돌아보며>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2월호 주제는 '2024년을 돌아보며'입니다. 아래 글은 오글오글 멤버 한라봉님 글입니다.
일요일 아침 6시에도 어김없이 알람은 울렸다. 일어나고 싶지 않다. 이 따끈따끈한 이불속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아침의 마지노선은 15분이다. 여기서 15분을 넘기면 씻지 못하고 눈곱만 떼고 뛰쳐나가야 한다. 결국 마지노선의 15분을 꽉 채우고 부랴부랴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긴 생머리가 유난히 거슬린다. 짧은 단발이면 샴푸와 드라이 시간이 15분은 줄어들 텐데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카락 따위 그냥 잘라버릴까? 수백 번도 더 한 고민이지만 10년 가까이 긴 생머리를 방치 중이다.
계단을 내려오며 시계를 확인하니 6시 53분이다. 주말 아르바이트 중인 편의점은 바로 집 앞이라 늦지는 않겠다. 건물의 공동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다. 역시 잘라버려야 하나?
해가 짧아질수록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오늘은 지난주보다 거리가 더 어둑하다. 바람도 더 차갑다. 시야에 내가 가야 할 편의점의 불빛이 보인다. 그곳을 향해 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혜미 씨, 초코랑 딸기 중에 어떤 게 좋아요?"
다예 언니가 냉장고 앞에 나를 데려갔다. 1+1이라고 적힌 쇼카드 뒤로 초코우유와 딸기우유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언니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언니한테 매번 받기만 해서 이번이 기회였다.
"아니야. 내가 이거 먹고 싶어서 살려고 했는데 1+1 이더라고. 그래서 혜미 씨가 뭐 좋아할지 몰라서 기다렸어."
기다렸다니 참 따뜻하고 귀여운 말이다. 우리는 편의점 계산대 안에서 사이좋게 초코우유를 마셨다.
"이거 입을래요? 얇아도 따뜻하거든."
언니가 입고 있던 패딩 조끼를 벗어주었다. 이런 호의는 거절할 수가 없다. 언니가 밤새 근무하며 데워진 조끼에 마음도 따뜻해졌다. 우리의 대화는 언니가 지인을 따라서 사이비 종교에 가봤던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과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없었다.
"제가 편의점 사장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확신을 했던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어느 날엔가 초등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편의점에 들어섰다. 조곤조곤 얘기하며 물건을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렸다. 이미 손에 다른 짐들이 들려있었기에 계산 후 봉투에 담아주었다.
"봉투 얼마예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모습이 참 예뻤다. 봉투는 유상 판매라고 안내를 해도 그거 얼마 한다고 돈을 받냐고 화를 내는 어른들을 보다가 내가 내민 봉투에 값을 정직하게 치르려는 아이를 보니.
"괜찮아요. 그냥 가져가세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엇, 지난번에 아저씨도 그냥 주셨는데"
이 편의점에서 아저씨라면 사장님밖에 없다. 평소에도 사장님은 아이들에게 참 친절하셨다. 사장님의 약자에 대한 배려는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날엔 할아버지가 장바구니 가득 빈 막걸리 통을 들고 오셔서 편의점 쓰레기통에 넣고 계셨다.
"이거 쓰레기 여기 버리시면 안 돼요. 이거는 월요일에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내놓으시면 돼요."
할아버지는 매번 막걸리를 사 가시며 영수증을 챙겨 가셨다. 막걸리는 동생이 먹는 거라며 지난번엔 동생한테 맞았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지 않아도 곧잘 하셨다. 겉모습은 평범해 보이지만 대화를 해보면 평범하진 않았다. 정신지체 장애가 있으신듯했다. 키도 체구도 나보다 작았다. 이 작은할아버지를 때렸다는 동생이라는 사람한테 화가 났다.
"여기 사장님이 여기에 버리라고 했어. 나 여기서 매일 막걸리 사 가거든."
아, 역시 사장님이라는 감탄이 나왔다.
내 이야기에 다예 언니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지난번에 알려준 맛집 있죠? 영주 언니랑 시간 맞춰서 셋이 식사 한 번 해요. 영주 언니가 맛집이나 예쁜 카페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 내가 살게."
기다리던 데이트 신청이다. 영주 언니는 다예 언니 지인으로 여기 편의점에 두 달 가량 알바를 했었다. 당시 영주 언니는 짧은 시간임에도 겪어봤을 때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좀 친해지려나 싶었을 때 영주 언니가 일을 그만두면서 참 아쉬웠더랬다. 다예 언니가 종종 영주 언니 소식을 전해줄 때면 나도 언니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다니 참 반가웠다. 연말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다예 언니는 결국 퇴근 시간에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이 수다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를 보내고 잠시 묵혀두었던 계획을 살며시 꺼내어 보았다.
내가 바라고 그리며 꿈꾸는 삶의 모습이 있다.
"언니, 저는요. 나중에 애들 독립 잘 시키고 작은 집을 하나 살 거예요. 그 작은 집에는 햇볕이 잘 드는 작은 마당이 있을거구요. 그 마당에서 나는 음악도 듣고 그림도 그리고 책을 읽을 거예요. 그리고 그 마당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작년 여름 술자리에서 인영 언니가 물었었다. 직장 다니며 쉬는 날 없이 아르바이트하고 그 돈 벌어서 다 뭐 할 거냐고.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누군가에겐 당장 돈을 좇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만약 내 아이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 또한 뜯어말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생활은 내가 그리고 있는 삶에 다가가기 위해 내 하루를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었다.
"저 이혼하고 사람들 안 봐요. 언니만 봐요. 이혼하고 보니까 내가 쌓아온 인맥이란 게 애들 아빠 아니었으면 없었을 거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스스로를 고립시켰어요. 내가 내 힘으로 바로 서서 진짜 내 사람들을 만나려고요."
다예 언니의 데이트 신청에 묵혀두었던 계획과 지난 대화들이 떠오르면서 2024년을 돌아보았다. 올해는 내게 사람이 온 해였다. 십여 년 만에 절친과 재회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었고 아르바이트하며 만난 좋은 사장님들과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사람으로 마음이 가득해지는 한 해였다.
초대장을 쓰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 햇볕도 좋은데 우리 집 마당에서 일광욕 어떠십니까?
햇볕이 잘 드는 작은 마당이 있는 작은 집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열심히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