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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Jul 01. 2015

캐나다 이민 <1>

나는 왜 고향 산천을 떠났나

1998년 1월 1일.  네 식구가 밥상머리에 앉았다. 돌아가면서 한 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와이프 "모두 건강하고..." 큰 놈 "합체할 로봇이 좀 빨리 나왔으면..." 막내는 취학 전이라 건너뛰었다. 내 순서.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 아내가 크게 놀라서 뒤로 자빠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는 정도. 큰애는 이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양쪽을 번갈아 봤다. 오랫동안 생각했었던걸 찬찬히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아내는 여전히 두려운 생각뿐인 듯 선뜻 동의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이민을 생각한 건 아이엠에프가 오기 훨씬 전이다. 세상 만물이 시시해지고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새로워야 먹고사는 직업인데 그런 감각이 없어지니 회사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마침 경기불황이 왔다. 이게 굳히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됐다.


우선 아내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현장학습이 중요하다고 보고 그해 3월 1일을 전후해서 일주일 휴가를 받아 뉴질랜드로 갔다. 손위동서부부도 심심풀이로 동행해주셨다. 이곳을 택한 건 우선 머릿속에 적은인구에 푸른 초원이 있고 사계절이 있으면서 우리보다 따뜻하다는데 점수를 줬다. 한마디로 좀 숨쉬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해  전 가을에 동네 친구가 이미 그곳에 이민을 간 것도  먼저 선택하게 된 동기도 됐다. 홀어머니한테는 여행 간다고 속였다.


2월 말경에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아직 여름이었다. 찌는듯한 무더위는 아니고 좀 선선한 정도. 이것도 맘에 들었다. 마중 나온 친구에 얹혀 그의 집으로 갔다. 이민 6개월의 살림살이는 아직 정리가 덜된 상태였다. 그곳에 군더기 식구가 더했으니 그 친구네도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한시바삐 나도 이대열에 합류해야 된다는 생각에 체면 차릴 여유가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이민에 대한 자료와 에이전트를 만나기 시작했다.  면담한 결과,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해초부터 비영어권 이민 문호가 많이 닫혀버렸다. 실망이 컸다. 다른 길이 있는지 친구를 통해 노크했다.


아주 오래 된 자동차를 몰고 젊은 교민이 친구 집으로 왔다. 2만 불만 내면 길을 가리켜주겠다고 한다. 답답하긴 하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별 소득 없이 귀국했다. 일단 뉴질랜드 이민국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책을 사고 자료를 모아 공부를 시작했다. 진척은 없고 영어 수준이 너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같이 갔었던 동서가 더 적극적으로 이민을 추진했다. 그는 캐나다로 생각을 굳히고 한이주공사의 설명회에 다녀와서는 내게 추천했다. 그길로 생각을 바꿔 그해 부산에서 열린 캐나다 이민 설명회에 참석한 뒤 그 자리서 바로 신청을 해버렸다. 다음해 3월쯤 서류가 접수됐다는 파일 넘버가 나왔다. 이젠 시간만 가면 가는 걸로 생각했다. 그때부터 회사생활도 열심히 했다. 나름 유종의 미를 염두에 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는데 인터뷰 날짜가 잡히질 않았다. 이민 신청자가 너무 많아 적체된 결과였다. 또 인문 사회계 전공자라서 이공계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다. 동서는 성장해가는 자녀들 때문에 마닐라로 인터뷰 장소를 정했다. 서울보다는 6개월 정도 빠르다고 했다. 예상대로 동서는 근 1년반쯤에 날짜가 잡혔다. 마닐라로. 우리 부부도 같이 갔다.뉴질랜드 동행에 대한  품앗이로. 인터뷰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미 서류로 걸려졌다고 봤다. 그러나 마닐라 영사는 동서의 영어 밑바닥을 훑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 당시 영어점수는 8,6,3,0점의 네 단계였다. 6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6점의 실력이 어떻는지는 몰랐다. 8점은 유창한 현지인 수준, 3점은 인사 정도만 해도 받는다고 했다.  예상대로 동서는 6점을 받지 못했다.운이 좀 나빴다고해야하나  영사중에서 빡빡한 사람을 만난 결과였다. 그는 또 한번 생각을 바꿔 2000년 1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이젠 내 차례다. 언젠가 날짜가 잡히리라보고 접었던 영어책을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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