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보금자리
<사진설명> 시골집에 감나무를 심었던 부모님. 한국동란이 나기 몇 개월 전쯤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당시 유행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무표정과 포즈를 취하셨다. 아마 신혼여행이 아니였을까 추정된다. 촌사람이 서울 갈 일은 이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빗장이 풀린 대문을 밖에서 밀고 들어가면 그 대문은 생색을 내면서 허락을 한다. 그 허락의 징표가 끼익 하는 마찰음. 이게 들리지 않으면 대문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릴 때 살았던 시골집은 대문이 컸다. 초등생인 내가 힘껏 밀어야 열렸다. 안과 밖의 차이는 나무. 안에는 꽃나무, 감나무, 석류나무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다. 그중에서 감나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또 그걸 대상으로 놀았던 추억도 생생하다.
대문 앞과 헛간 앞 그리고 집 맨 안쪽에는 납작한 떫감이, 우물가와 장독대, 집 뒤, 아랫채 쪽에는 단감나무가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마당을 휘젓고 다닐 때는 작은 나무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는 크고 작은 나무 가릴 것 없이 두루두루 올라 다녔다. 감나무에 오르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감을 따기 위해서, 또 다를 하나는 그곳에 지어놓은 작은 오두막에서 놀기 위해서다.
감나무에 오두막을 지으려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받침목을 놓고 그위에 합판을 깐 다음에 햇빛을 막을 천막을 쳤다. 이중 일부는 아버지가 해주셨다. 생나무가지에 못질하는 게 가슴 아프다면서도 어린 아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셨다.
그 정도면 동네 친구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규모다. 서너 명은 충분히 비비고 누울 정도였다. 여기서는 주로 그 당시 유행했던 놀이를 하고 그 벌칙으로 잘 익은 감을 따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까이에 달려 있던 감도 차츰 멀어져 가고 위험부담이 가중됐다. 그럴 때마다 놀이는 스릴을 더해 갔다.
따놓은 감은 꼬맹이들이 소화하기엔 양이 많으면 뒷길을 통해 지나가는 동 넷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담벼락에 살짝 올라와서 우리 감을 도둑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땐 가만히 지켜 보다다가 손이 가까이 오면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 간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뒤로 자빠지고 우리는 큰 즐거움에 동네가 떠나갈 듯 웃어젖혔다.
이 놀이도 가을이 되고 진짜 수확의 계절이 되면 단감나무 보호에 들어간다. 시골에선 단감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100개 한 접에 얼마씩 사러 다니는 분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도 우리 먹을 것 적당량을 두고 모조리 넘겨셨다. 대신 떫감은 사람 손을 늦게까지 타지 않아 겨우내 우리의 간식거리로 남았다. 늦여름에는 소금 장독에 재워서 떫은맛을 없애서 먹고, 노랗게 익을 때쯤이면 그냥 빈 장독에 차곡차곡 쌓아 뒀다. 그러면 홍시가 됐다. 단감 홍시는 맛이 없는데 떫감은 홍시가 한결 부드럽고 먹기가 편했다.
이 모든 즐거움은 아버지의 손길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고마움은 몰랐다. 나무는 햇빛과 물만 있으면 저절로 잘 자라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줄 알았다. 감나무 꽃이 피면 그저 주워 먹거나 떨어진 꽃잎을 모아 목걸이 만드는데만 열을 올렸다. 열매가 맺히면 그것도 또한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솎아주고 가지를 쳐주고 껍질을 벗겨주는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이젠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감나무를 관리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 것 같아 좀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