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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Oct 18. 2015

캐나다 이민생활 <18>

적응기와 장애물(B)

(사진 설명) 아침 출근길에 만난 해 뜨는 장면. 저 찬란한 태양처럼 오늘 하루도 빛나게 해주소서... 해가 점점 짧아짐을 느낀다. 골목길은 아직 어둑 살이 배어있다.


그때 5학년 2학년이었다. 14세 미만은 집에 혼자 둘 수 없고 18세 이상의 성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가족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지킬 수가 없었다. 먹고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둘 중 한 명이 집에 남으면 가게일을 해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애들을 남겨두고 세탁소 일에 매달렸다. 그래도 최소한 주변 이웃들에게 들키지 않게 교육을 시켰다. 여긴 신고정신과 오지랖이 넓어서  안심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하교 뒤 가급적이면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했다. 몇 주는 제대로 하는 것 같았는데 영어가 되고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그 또래의 놀이 문화대로 바깥 생활이 늘어갔다.


하루는 저녁답에 집으로 누군가 찾아왔었다. 백발의 백인 노인이었다. 단지 내 자치회장 비슷한 직책을 말하면서 우리애들에 대해 말했다. 헬멧을 쓰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하고 너무 떠들어서 주변의 원성이 높다는 취지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가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가까이 있으면 틈을 내서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인들 동네에서 동양인이 렌트를 얻는 게 쉽지는 않았다. 우선 지역 신문을 보고 전화를 한 뒤 약속을 잡아 집으로 찾아가면 이상한 눈길이 우릴 기다렸다. 가령 오후 2시에 집주인을 만나 내부를 보기로 했다면 이미 이 시간에 누군가 먼저 만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기다린다. 30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든다. 분명히 우리가 도착했고 지놈 주변에 있음을 인지 했을 텐데  전혀 반응이 없다. 이런 게 두 번 있었다.


또 한 번은 약속을 잡고 막 갈려는데 전화가 와서 금방 나갔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도 뒷맛은 맑지 못하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무식해서 산통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집은 실제 200a에 위치해 있었는데 나는 208에서 찾아 헤맨 적이 있다.  이 두 주소는 영어가 약한 사람이 들으면 똑같다. 주인은 주인대로 사람이 안 오니 신경질이 났고 나는 왜 찾는 집이 없느냐고 전화통을 붙들고 하소연하고... 결국 가게로 다시 와서 종업원을 시켜서 정확한 주소를 불러달라고 하자 그때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하면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다. 냉정한 것들.


결국 종업원인 베티를 시켰다. 영어 잘되고 렌트 얻을 사람이 세탁소 주인이라고 설명하니 집주인은 우리가 어느 민족인지 묻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렌트비 안 밀리고 잘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인들은 그걸 잘 몰랐다. 일단 그 집으로 갔다. 우리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베티가 그만큼 썰을  잘 푼  결과였다.


집 주인은 덴마크 이민후예였고 의외로 부인은 중국인이었다. 둘 다 재혼. 나이차가 좀 났다. 우리 가족이 본채를 쓰고 그들 부부는 지하로 살림을 옮겼다. 시집 간  주인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약값 보조를 위해 세를 놓은 것 같았다. 오래 된 집이지만 이민 온후 처음 느껴보는 캐나다식 집이었다. 앞뒤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뒤편은 너구리 가족이 살 정도로 숲이 우거졌었다. 게다가 가게도 가깝고 애들 학교도 걸어서 10분 정도. 모든 게 안성 맞춤 같았다.


또 주인의 중국 부인도 아내와 너무 잘 맞았다. 이 부인은 영어단어 50 개정도만 사용하는데 남편 하고 전혀  문제없이 의사소통하고 어떤 때는 싸우기까지 한다. 그렇게 영어를 말하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걸 알아 먹는 사람은 더 대단해 보였다. 우리 와이프도 금세 그 부인의 영어를 알아듣는 수준까지 됐다. 둘 다 초보단계이지만 몇 시간씩 재잘거린다. 한번 말문이 열리면 닫을 줄 몰랐다. 그 부인이 우리 이사 전까지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일주일에  한 번씩 뒤뜰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기로 했다. 주최는 번갈이 가면서 맡기로 했다. 쟤들은 주로 닭과 햄버거 페리를 굽고 우리는 엘에이 갈비를 선보였다.  이때 아무 영어나 들이대면서 우리도 말귀가 조금씩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집 걱정 애들 걱정이 사라지자 가게에 총력을 쏟기로 했다.  의외로 백인 손님들 중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을 여럿 경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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