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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Oct 11. 2015

캐나다  이민 생활 <17>

적응기와 장애물(A)

(사진설명) 가게 앞 메인도로. 오른편이 우리 상가 건물이고 왼편 숲뒤편은 주택가. 가로수도 어느덧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길 건너 새 주택단지는 조성될 당시 40만 불이었는데  몇 년 뒤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면서 거의 밀리언에 거래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리샤. 줄여서 팻이라 부른다. 영국 북부 선더랜드에서 이주 온 이민 일 세대이다. 간혹 프리미어리그 선더랜드 팀 경기가 열리면 고향 까마귀라고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30대에 할머니가 됐다. 10대에 낳은 딸이 똑같이 10대에 딸을 낳았다. 우리가 이 가게를  인수할 당시 외손주들이 제법 컸었다. 그녀의 남편도 영국 출신이다. 고교 때 연애를 해서 덜컥 애를 낳으면서 같이 살게 됐고 먹고살 길 찾아서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천성적으로 불성실하고 게을렀다. 사는 게 형편없었다. 방한개짜리 아파트에서 그들 부부와 딸 부부 외손주 둘에 장성한 아들까지 함께 살았다. 경제 활동은 그녀가 유일했다.


남편은 주방가구 만드는 목수인데 워낙 불성실해서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사위도 비슷하고 아들은 학생이었고 딸은 애들 때문에 직업 전선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결과 그들은 모조리 신용불량자여서 은행 게좌를 낼 수가 없었다. 월급으로 수표를 주면 와리깡 해서 썼다. 힘든 가정 경제지만 매일 담배 두 갑은 기본으로 샀다. 부부가 각각 한 갑씩. 그리고 간혹 할머니 노름방인 빙고홀에도 다녔다. 한방에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지... 결국 다 잃게 된다. 이런 환경을 벗어날 능력은 물론이고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런 사람을 데리고 세탁소  첫출발을 하게 됐다.


다른 일꾼 엘리자벳은 달랐다. 베티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 이민 3세대다. 할아버지 세대가 동부 노바스코시아로 이민을 왔다. 농사가 주종목이어서 자녀들이 많다. 그녀는 9녀 1 남중 중간쯤. 아들 놓으려고 딸을 계속 낳은 건 아니고 생기는대로 생산한 결과다. 대부분의 자매들은 동부에 살고 그녀와 아래 동생만 서부에 산다. 상당히 똑똑 한편이다. 일도 잘하고 일머리도 좋고 눈치도 100단이다. 엉터리 영어를 해도 알아먹는다. 그녀는 우리가  인수할 당시엔 일을 쉬고 있었다.  아들이 자살해서 그 충격을 씻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면서 합류하게 됐다. 이가게서 20년 이상 일했기 때문에 가게  사정뿐만 아니라 단골들, 더 나아가 동네 주민들도 훤히 꿰차고 있었다.


초기 이 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베티는 절대적이었다. 옷감 대미지가 생기면 회복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염색을 새로 해서 새옷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손님들이 우릴 얕잡아보고 뭐라 하면 뒤에서 듣고 있다가 슬며시 우리 곁에 와서 우리 편이 돼주기도 했다. 베티는 말을 아주 조리 있게 잘했다. 절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의 말을 다 들어준 뒤 자기의 의견을 말하면서 상대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베티도 얼굴이 빨개 질 때가 있다. 누군가 "너의 영어 엑센트가 스코틀랜드 같다"고 하면 약간 흥분한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안전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고 두려운 건 손님 맞이. 아내와 난 서로 카운터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도어 차임벨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두 종업원을 3개월가량 연장 근무시켰다. 보통 오후 2시면 일이 끝나고 손 씻고 집에 가는데 문 닫을 때까지 붙잡아 뒀다. 의외로 카운터일은 일주일 가량 지나자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거의 한정돼 있었다. 그게 한바퀴 돌자 눈치껏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가끔 못 알아 먹으면 펫이나 베티가 거들어 줬다.


문제는 또 있었다. 손님들의 세탁에 대한 신뢰였다. 세탁소 옷 맡기려 가본 적은 있지만 실제 구경도  안 해 본 처지였다. 게다가 말까지 서툴자 일부 손님들의 이탈이 시작됐다. 믿지 못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어떤 손님은 좀 떨어진 거리에서 자기 옷을 펼쳐 보이면서 무슨 재질인지 맞춰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건 수모라기보다는 내가 빨리 극복해야 될 문제라 생각하고 옷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면서 손으로 감촉을 익혀 나갔다. 이건 한 달 안에 얼추  해결됐다.


 다른 문제는 장비와 기계 관리. 가게 안에 무슨 기계와 장비가 많은지... 이놈들이 주인이 바뀌자 탈이 나기 시작했다. 꼭 애기 같았다. 돌보는 손길이 달라지자 응석 부린다고 할까.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을 부르면 금방 오지 않았다. 하루에서 삼일씩 기다려야 왔다. 온다고 100프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최고의 난제였다. 손님들은 제시간에 옷을 입어야 하는데 세탁은 안돼 있고... 그러나 대부분 이해를 했다. 간혹 티를 잡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신용이 우선이기 때문에 백배 사죄를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서서히 드라이 클리너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긴장 속에 한 달을 보내고 우리 집을 한번 돌아보았다. 초등생 애 둘은 어떻게 지내는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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