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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Jan 15. 2016

캐나다 이민생활 <30>

우리와 너무 다른 의료시스템의 명암(D)

(사진설명) 4인실 내부 전경. 출입문은 왼쪽에 있고 화장실은 오른쪽 뒤편이다. 천장에 달린 레일을 따라 커튼이 각 베드의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각 베드마다 바퀴가 달린 협탁자가 하나씩 배치돼 있다.환자가 전혀 없는 순간이 없는데 묘하게 사진을 찍었다. 구글에서


하루 이틀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되기 시작했다. 밥맛도 돌고 병원 돌아가는 모양새도 감지되고. 따라서 마누라의 도시락은 중단시켰다. 하루 종일 가게서 일하고 그것까지 챙겨달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다. 와이프 일 마친 뒤 그냥 가족들하고 잠깐 말 는 것으로 만족했다.


집도의는 하루 두 번에서 몇일뒤부터는  퇴근하는 길에 잠깐  한번만 들렀다. 그냥 쓰윽보고 간호사한테 오더 내리고 가는 정도였다. 하루가 다르게 열이 조금씩 내리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발이 공중에 붕 떠다니는 것 같았는데 이젠 그 정도는 아니었다. 병원내 걷는 것도 꾸준히 하고 남는 시간엔 쓸데없는 상상에 시간을 허비했다. 따로 할만한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5일 밤을 보내고 드디어 퇴원했다. 2주일치 처방전을 줬다. 약 복용 뒤 집도의 확인 절차가 마지막으로 기다렸다. 병원비는 없었다. 의료보험 가입자에게 한해서 무료였다. 만일 비보험자였으면 한 4천만 원 정도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긴 의료수가가 무지하게 높다.


2주 뒤. 집도의 사무실에 갔다. 병원 주변 메디컬빌딩에 많은 전문의들이 합동으로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개개인의 사무실에는 아가씨 한 명과 의사뿐이었다. 흔히 보이는 병원 기구는 전혀 없었다. 자기 환자 중에 수술이나 검사가 필요하면 곁에 있는 종합병원의 시설을 공동으로 빌려 쓰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나처럼 수술 환자가 응급실을 통해 들어오면 병원 코디네이터가 수술팀을 조합해서 일선에 배치하는 식이었다.


그 의사는 수술한 뒤 발라뒀던 밴드를 집어 뜯으면서 모든 게 완벽히 잘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자기 보수는 병원에서 정산해서 의료보험 공사에 보내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입원병동엔 의사가 상주하지 않았다.


정확히 10년 뒤 또 한 번의 입원 기회가 생겼다. 작년 6월. 고열로 시달리다가 할 수 없이 응급실을 노크했다. 응급실에 간다는 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순간으로 보면 된다. 예전과 똑같은 과정이 기다렸다. 마침 일요일 오전이라서 와이프가 곁에 있었다. 해가 있는 동안 기다렸다. 밤 8시쯤 응급실에서 한 급 격상된 일 인실이 배정됐다. 그 방은 응급실 의사 대기실 바로 앞이어서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햄버거를 물고 뭔가 열심히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검사한 결과 요 도관 쪽 감염으로 판정 났다. 소변보기가 불편하고, 양도 적고, 잔뇨감도 좀 있고, 자주 갔다. 인터넷에서 봤던 그 증상이었다. 그 병실엔 각종 기구가 흡사 중환자실처럼 얽혀 있었지만 정작 아무런 조치는 없었다. 그러다 1시간쯤 뒤 첫 조치가 떨어졌다. 관 삽입. 들은 얘기가 있어서 거부했다. 현재 소변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피노 간호사는 씹 다 달다 한마디도 없이 철수해버렸다. 또다시 30분이 무겁게 흘렀다. 이번엔 그 간호사가 이동식 초음파검사기를 가져왔다. 화면을 내게 돌려놓고 내부에 있는 소변 양을 보여줬다. 할 수 없이 삽관을 하기로 했다.


옆에 있던 와이프와 딸 그리고 옆집 아줌마를  밖으로 보냈다. 밖이지만 문대신 7부 커튼이어서 소리는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녀는 베이지 칼라 장갑 낀 왼손 엄지와 검지로 내 그 석의 끝을 살짝 누르면서 구멍을 확보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관을 밀어 넣었다. 세상천지가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참으려고 입을 앙다물었지만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 이소리는 밖으로 전달됐고 옆집 아줌마는 토할 것 같다면서 귀가해버렸다. 이렇게 씨름하기를 한참.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그 필리피노가. 관 사이즈가 안 맞다고. 맞을 리가 없지. 맨날 덩치 큰 백인들만 상대하면서 손에 익은 사이즈를 들이대니 어떻게... 서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확 잡아 뺏다. 그때는 전혀 안 아팠다. 다만 새 관을 가지고올 때까지 기다리는 몇 분이 힘들었다.  두 번째 시도는 몇 배 더 공포로 닥아왔다. 나도 모르게 내 오른손이 간호사 아줌마의 바지 고무줄을  잡아댕 겼는데 이점에 대해선 뒤끝이 없었다. 밖에 있던 아내와 딸도 함께 힘들었는지 얼굴이 땀으로 덮혀 있었다.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소변보는 게 이불에 하는 것 같아 약간 망설여지긴 했지만 대체로 잘 돼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11시쯤 병실로 올라갔다. 야간 당직 간호사가 무척 많았다. 타이완 수습 간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가씨가  뭘 묻기 시작했다. 자기 출신을 말하는 건 좀 이례적인데 같은 동양인이라는 호감 표시정도 아니었나 싶다.


한 5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근 한 시간 정도 아픈 사람을 붙잡고 늘어졌다. 시시콜콜한걸 다 물어봤다. 음식, 먹는 약, 가족력, 입원 경력 등등. 여기서 또 세분화돼서 들어가고 가고 해서 내 파일이 대학 책만 했다.  그리고 그파 일을 의사는 물론이고 책임간호사 담당 간호사가 다 읽어보는 것 같았다. 그리곤 병실로 들어갔다. 차수가 바뀠다. 익일 새벽이었다.


내 베드는 문에서 멀고 화장실은 가까우면서 그 앞이 아닌 곳이었다. 그리고 창이 있었다. 너무너무 줄을 잘 선 것 같았다. 며칠이 아니라 한 달은 견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고향집.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를 따는 느낌이랄까.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가족은  돌려보내고 조용히 시트를 들어 몸을 감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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