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듯 있는 국경에 얽힌 애환
(사진 설명) 하얀 콘크리트 구조물이 국경 표지석이다. 길은 캐나다 영역이고 이 지역은 군데군데 개발이 돼 사람이 살고,미국 편에서 보면 가장 북쪽이니 얕은 구릉에 숲으로 우거진 나대지로 방치돼 있다.
우리 가게서 정확히 8킬로미터 남쪽으로 가면 미국 국경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특별한 장애물은 없다. 다만 1킬로 간격으로 하얀 구조물을 세워뒀다. 이길로는 사람의 통행은 불가능하고 짐승들만 드나들 수 있다. 여긴 야산이라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서 몇십 미터만 들어가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가이드만 있으면 이길도 뚫을 수 있다. 우리 한인들의 애환이 서린 저 아스팔트 길 이름은 0 avenue다. 보통 1부터 시작하는 게 관례인데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0을 붙인 것 같다.
이젠 옛 얘기가 됐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기회의 땅을 찾아 나선 한인들이 이 루트를 많이 이용했다. 더러는 성공했고 가끔 적발돼서 현지 신문에 나기도 했다. 주로 이 근 방이다. 산이 낮고 조금만 가면 인가가 나오면서 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현지 신문에 '비자 없이 미국에 빨리 가실 분'이라는 제목으로 광고가 나곤 했다. 심지어 국경검문소 근방 주유소에도 이런 종류의 입간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그때 얼마나 이용했는지 통계는 없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비자가 꼭 필요했었던 국가들은 다 관심을 뒀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도 아마...
일단 사람을 모은 뒤 현지 브로커 겸 가이드를 미국 야산 어디에 배치한다. 그러면 캐나다쪽 조력자가 국경 근방 바로 저길로 데려간 뒤 순간적으로 풀어 몸을 숨긴다. 어떤 장애물도 없기 때문에 미취학애기가 있는 일가족도 쉽게 건널 수 있다. 그리곤 소리를 죽이면서 약속 장소로 이동한 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가까운 시애틀부터 태평양 인근 도시로 데려다 준다. 주로 최종 기착지는 로스앤젤레스가 많다. 불법체류자가 먹고 살기에는 같은 동포가 많고 대도시 여야 한다.
처음에는 차를 정차한 뒤 거사를 도모했는데 그 뒤 하늘의 감시 장비가 늘어나면서 국경 근방에서 차가 서면 무조건 추적한다는 풍문이 돌아 밀입국자를 실은 차가 서행하면서 한 명씩 떨구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이처럼 캐나다 국경을 많이 이용하는 이유는 멕시코에 비해 국경감시가 느슨하기 때문이다. 실제 국경 검문소가 있는 곳에서도 버젓이 걸어서 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여름휴가 성수기가 찾아오면 국경은 살인적 정체가 시작된다. 불과 1킬로 진행하는데 한두 시간씩 대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때 생리적 현상이 생기고 근방의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는데 가까운 캐나다 걸 놔두고 슬슬 걸어서 미국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마 일 본 뒤 샛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면 된다. 이중 간지 역은 피스 아치라는 공원으로 조성돼 있어서 어디가 미국이고 캐나다인지 구분이 안된다. 우리도 차 안에 기다리면서 무리 속에 섞여서 슬슬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돌아오지 않을 사람' '돌아 올 사람'으로 장난 삼아 찍어보기도 한다. 아마 허술해 보여도 미국 쪽에서는 어떤 방책을 세워 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당시 우리 주변에도 이런 걸 결행하다가 잘못된 케이스도 있다. 이분은 엘 레이를 목표로 브로커를 만났고 이브 로커의 방식은 정면돌파였다. 이는 남의 비자로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이다. 비자의 사진을 바꿔치기도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우리를 잘 구별 못하기 때문에 그냥 보여줘도 긴가 민가 한다. 이브 로커는 자신의 와이프 비자를 그분에게 쥐어줬고 큰 문제가 없을듯했는데 이브 로커의 전과가 문제가 돼 정밀조사가 진행되면서 뽀록이 나버렸다. 우리 지인은 생전 처음 가는 곳의 첫날밤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말이 통하나 한식이 제공되나 지리에 밝기 나하나, 향후 어떻게 되는지 변호사의 조력을 받기 나하나...
궁하면 통한다고 검찰에서 손을 내밀었다. 검사는 기소 유지를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했고 지인에게 법정 증인을 요청하면서 딜을 시도했다. 브로커에겐 배신이지만 살길을 찾아 눈을 돌렸다. 증언 대가로 지인은 한시적 거주비자를 발급받았다. 일종의 새옹지마가 된 셈이다. 그브 로커는 상습범으로 걸려 실형을 살았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이젠 옛일이 됐다. 무비자 입국이 되면서 밀입국 브로커 산업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국경에는 양국의 검문소가 출입국을 통제하고 있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미국 입국은 좀 까다롭다. 특히 911 이후부터는 '좀 안 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검문검색을 하는 듯이 보인다. 국토안보 측면에 주안점을 둔다고나 할까. 반면 캐나다는 좀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주로 뭘 사 오는지를 살핀다. 또 미국 직원은 총을 차고 있고 캐나다는 비무장이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한토막. 몇 년 전 미국에서 대낮 강도 살인자가 캐나다로 도피한다는 첩보가 떴다. 캐나다 검문소 직원들이 국경을 걸어 잠그고 걸어서 미국 사무실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두 나라의 국경은 주로 도면상 줄을 쫘악 그으면서 생긴 탓에 크고 작은 문제가 여럿 있다. 밴쿠버 남쪽 델타 반도라는 곳은 미국이다. 캐나다의 끝자락인데 위도상 남쪽이어서 그렇게 됐다. 그곳 주민들은 미국 방문하려면 캐나다로 와서 다시 육로로 국경을 넘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개발이 안돼 있다. 주로 밴쿠버 주민들이 골프 치러 가거나 싼 휘발유 넣으러 가는 정도.
BC주의 주도인 빅토리아는 국경 위도 훨씬 남쪽인데 캐나다인 것은 국경 협상 이전에 눈치 빠른 당시 총독이 주도로 정하면서 미국 측의 양해를 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우리 동네 외곽에 오터협동조합이란곳이 있다. 초기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공동 판매를 위해 만든 것이다. 아직도 그 후예들이 맥을 잇고 있다. 이 지역 바로 국경 밑 미국에도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풍차를 세워 뒀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마 국경 개념 없을 때 넓게 분포돼 살았던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