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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살아가기
by 뜬구름 Feb 12. 2016

캐나다 이민생활 <34>

웃음으로 보내는 그들의 장례문화

(사진 설명) 우리 동네 유일의 공동묘지. 바닥의 비문 한 장이 한 묘지 턱이다. 이 묘지는 화장한 뒤 작은 항아리에 뼈를 담아  땅 아래 공간에 보관하는 스타일이다. 이 묘지도 세월이 가면서 택지처럼 오르기도 한다. 몇몇 한인들이 빈 묘지를 사놓기도 했는데 멀리 이사 갈 경우 전매는 안되고 산 가격에  반납할 수는 있다. 우리 가게 종업원 베티의 아들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 묘지 관리인은 쇼벵이라는 프랑스계 아저씨인데 덩치가 무지하게 크다. 그의 점퍼를 내가 입으면 발목까지 내려온다.


우리는 누군가 사망하면 눈물로 저승길을 배웅하는 반면 여기 현지인들은 우리하고 좀 다른 장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간혹 장례식장이  웃음꽃이 필 때도 있다.  무턱대고  즐거워하는 건 아니고 재밌는 에피소드라든지 고인이 과거에 했던 실수담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띄운다. 물론 간간이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눈물을 떨구는 사람들도 있다.


종업원 베티의 신랑이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베티보다 20살이나  많다. 당시 80 초반쯤이었을 거다. 사망 10년 전쯤부터 파킨슨씨병을 앓아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다가 운명했다. 좋은 약이 나오긴 했지만 치료는 힘들고 진행을 더디게 할 수는 있었다. 그도 의사의 말로는 5년이 맥시멈이라고 했는데 그 두배인 10년을 연명했다.


서양사람들의 장례식에  초대받으면 우선 걱정이 앞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안 하면 뭘로 대체하는지, 또 식장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 모든 게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동료의 남편인데 안 갈 수는 없고... 부조는 생략하고, 빈손으로 가기도 뭘 해서 흰꽃을 좀 샀다.


장례식장은 작고 깨끗한 단층짜리 건물이었다. 내부는 의자가 놓여 있는 큰방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시신을 모시는 작은 공간이 별도로 있었다. 먼저 눈치를 보면서 앞사람을 흉내 냈다. 줄은 선 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잠시 묵념 같은걸 하고 곁에 있는 유족에게 허그를 하면서 위로를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꽃을 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 다른 건 따라 하면 되겠는데 이 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줄지어 순서대로 하면서 꽃을 고인의 관 옆에 놓기로 마음속으로 작정을 했다. 그러나 막상 놓으려고 보니  장소가 마땅찮았다. 뚜껑을  열어둔 데다가 무턱대고 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때 눈치 빠른 베티가 문제의 그 꽃을 덥석 받아줬다. 그리고 남들이 다하는 허그를 했다.


베티는 키가 무척 크기 때문에 제대로 된 허그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허리를 숙여 몇 마디  주고받았다. 나도 평소에 고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빼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덩치가 좀 있는 편인데 사망한 뒤의 모습은 너무 왜소해 보였다. 깨끗하게 화장한 뒤 양복을 입혀 꼭 잠자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장례절차가 시작됐다. 별도의 방에서 사회자가 유족을 소개하고 고인의 약력을 잠깐 낭독한 뒤 과거와 현재의 친구들을 연단으로 불렀다. 간혹 자청해서 나오기도 했다. 특히 처제들이 줄줄이 나와서 옛일을 회상했다.


친구들은 주로 한직장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거리에 살을 약간 붙여서 재미있게 썰을 풀었다. 보통 여기 사람들은 과거의 친구는 잊히는데 장례식에서만큼은 부르면 참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을 설익게 풀어보면, 고인은 런던 근처에서 출생해서 이민 온 일 세대이고 프리미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첼시의 광팬이라고 소개했다. 결혼은 두 번째인데 자녀는 없다. 따라서 베티는 노났다. 상속이 모두 베티에게 가기 때문이다. 골프도 즐겼는데 병을 앓고부터는 9홀 정도를 하다가 그것마저 중단했다는 친구의 증언.  이들은 주로 웃음을 유도하는 분위기였다면 처제나 의붓딸은 애틋한 고인과의 과거사를 회고하면서 눈물을 뿌렸다.  


이행사가 끝나면 피시 엔 칩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대접했다. 그곳에서도 좀 마시면서 웃음꽃이 피었다.


고인은 화장된 뒤 묘지에 안장되거나 집에 보관하게 된다. 베티는 아직도 자기 집 거실에 남편의 유골을 두고  아침저녁으로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옆 가게 아저씨가 가게를 한지 5년쯤에 노환으로 운명했다. 상인조합 총무가 연락을 해왔다. 시신을 곁에 둔 장례식은 아니고 골프장 레스토랑을 빌려서 고인을 회상하는 자리였다. 여기서는 오로지 먹고 마시면서 그의 행적을 드듬는 분위기쯤이었다. 그냥 좋은 면만 말로써  주고받았다.


젊은이나 어린 학생의 죽음도 별로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우리 작은애 고교시절 물리과목을 같이 듣는 옆자리 친구가 아주 사소한 일로 목을 메 자살을 했다. 문제의 발단은 외출한 그의 어머니에게 차를 쓸 수 있게 허락을 요구했다. 그녀는 아직 운전이 미숙하다며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이 입씨름이 몇 번 오고 가다가 이 친구가 "그럼 나 죽어버릴 거다" 란 말에 그의 엄마도 농담 삼아 "그러렴"이라고 했는데 그는 실제 실행에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 얘기가 교내에  전달되면서 많은 동료들이 패닉에 빠졌다. 학교 측에서는 급히 카운슬링팀을 구성해서 가까운 친구들을 위험군으로 분류한 뒤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죽은 학생은 공부와 운동을 잘해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데다가 학생회 리더로서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충격은 더 큰 것 같았다.


그러나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장례식장의 분위기. 가장 슬퍼해야 할 그의 어머니의 표정이 전혀 슬퍼 보이질 않았고 그의 친치들도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슬픔에  괴로워했었던 친구들은 이 모습을 보고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오게 됐다. 부모들의 무 슬픔은 종교적 신념이 아닐까 짐작된다. 사후에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라는 생각. <계속>

magazine 외국에서 살아가기
벤쿠버 이민 18년차입니다. 초기 좌충우돌시기는 지났고 이젠 숨쉴만 합니다. 세탁소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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