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분
생전 큰어머니가 귀여워하셨던 조카며느리(사진 오른쪽). 지난 늦가을 시애틀 워싱턴 호숫가에 위치한 한 수녀원에서 열린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호숫가로 내려오고 있다. 이곳은 주변 경관이 빼어나서 부자들이 모여 있고 그중에 빌 게이츠의 집도 이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
객지에 살다 보면 문득 고향 생각날 때가 많다. 특히 나의 고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라 더더욱 애틋함이 남아있다. 샘물이 맑고 앞뒤들이 넓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준 곳이라서 더 그렇다. 그 고향은 현재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업화 기치로 창원공단이 됐고 그 위치에 엘지 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셈이다. 지금도 눈을 감고 우리 마을 50여 호의 집들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신기하리만치 다 떠오른다. 게다가 몇몇 집은 감나무 대추나무 등의 위치도 어제 일처럼 손에 잡힌다.
향수의 끝에 항상 등장하는 한 분 계신다. 바로 큰어머니다. 시골에서는 큰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줄여서 '클매' 작은어머니는 '잘매'라고 한다. 할매 할배도 같은 차원이다. 이게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걸음마를 떼고부터 같은 동네에 있는 큰집을 들락거렸다. 내 또래의 사촌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그곳으로 모였다. 홀아비인 할아버지의 말벗도 되고 크고 작은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그 부상으로 큰어머니는 계절에 따라 간식거리를 장만해주셨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홍시 찐쌀 등등 수없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걸 장만하려면 귀찮을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어깨에 올려진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하면서...
우선 남자들이 손도 대지 않은 목화 농사를 지었다. 희한하게 다른 건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하는데 목화밭만은 여자들 아니면 애들 몫으로 내팽게쳐진듯했다. 목화는 진짜 손 가는 게 많다. 일일이 손으로 따서 불리고 실을 뽑고 그 가는 실은 베틀에 올려 베를 짜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베가 완성되면 옷도 만들었다.
이과정 중간중간에 들에 있는 일꾼들 참도 준비해야 하고 마당에 늘어둔 벼나 보리를 뒤비 거나 겉어야 한다. 이때는 신발을 벗는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맨발일 때가 더 많다. 왜 그렇게 밥때는 자주 찾아오는지.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밥때다. 시골밥상은 구조가 아주 복잡하다. 할아버지상, 남자 어른상, 미성년 남자상, 그다음이 여자상에다가 마지막으로 부엌상이다. 큰어머니는 부뚜막이 고정석이다. 밥상을 몇 개나 차려야 하고 상마다 찬이 조금씩 다르다. 그걸 배치하는 것도 머리 아픈 일인데 그찬을 준비하는 것도 만만찮았을 것으로 보인다. 식사 중간중간에 수시로 오더가 떨어진다. 그걸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부뚜막에 맨발로 식사를 하시는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당시 현대식 방앗간이 없어서 집안에 설치된 디딜방아로 벼의 껍질을 벗겼다. 두 개의 발판에 연결된 긴 목과 그 끝에 붙은 절구가 절구통의 벼를 내리꽂는 식이다. 문제는 절구의 발판을 눌러 들어 올려야 하는데 이게 힘들다. 천장에서 내려온 손잡이를 불끈 쥐고 오른발 왼발 번갈아가면서 눌려야 하는데 몇 번 하고 나면 다음날 학교 가는데 지장이 많다. 발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위로 들리고 앞으로 나가질 않느다. 이걸 큰어머니는 아마 셀 수 없이 많이 했을 것이다.
대식구의 빨래 거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특히 옷이 몇 가지 안되니 벗어내는 쪽쪽 빨아야 했다. 여름에는 대문 밖 우물가에서 빨지만 겨울에는 얼기도 하고 찬물이라서 동네 어귀에 있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약물 통으로 가지고 가셨다. 이것도 아마 매일 일과였을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신 큰어머니는 결혼 전에도 무지하게 일만 하시다가 장남에게 시집오게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일복을 타고나신 것이다. 일 때문에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70년대에 시골에도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큰집도 비교적 빨리 장만하신 편인데 이게 큰어머니를 좀 불편하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tv를 켜면 매번 놀래신다.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저런 작은 세트에 여럿이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해하셨고 그래서 tv케이스를 요리조리 살피기도 했다. 그러니 재밌는 연속극을 볼 수가 없었다. 하긴 볼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은 큰어머니의 이름으로 인해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당시 시골의 여자 어른들의 이름은 본인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 이름으로 모든 행위가 이뤄지다 보니 자연적으로 여자들의 이름은 묻히고 대신 택호로 불려졌다. 큰어머니도 친정동네인 야촌 댁으로 불렸다. 그 동네에 사는 친정 조카가 공교롭게도 같은 반 친구였다. 그래서 성씨는 알게 됐다. 문씨. 그러나 이름은 그 녀석도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이 친구 집에서 숙제로 국어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었다면서 내게 자신의 고모 즉 나의 큰어머니의 이름을 살짝 말해줬다. 그때 교과서에서 한참 날리던 영희였다. 문영희. 좀 생뚱맞았다. 집 안팎에서 대 식구를 이끌고 가는 여장부의 이름으로는 너무나 연약해 보이면서 도회적인 냄새가 물씬 났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그 뒤로도 계속 비밀 아닌 비밀로 묻혔다.
대가족의 중심이셨던 큰어머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몇 년 전에 먼길로 가셨다.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쏟으셨는데도 불구하고 난 전화 한 통으로 병실의 큰어머니를 위로하는데 그쳤다. 저승에서는 부디 일하지 않고 지내시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