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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띠 Jul 05. 2022

어색한 인사

경험을 통해 배운 잘 사는 ‘감각’

"아... 안녕하세요!"

떨리는 심장소리를 감추면서 한 자기소개가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모든 시작에는 떨림이 존재한다.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경험이라면, 그 두려움은 설렘일 것이다.


야마구치 슈와 구스노키 겐의 공저 <일을 잘한다는 것>에서 '감각의 사후성'에 대한 내용은 인상 깊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사후성'이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중에 회상하며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한다.

그래서 감각의 사후성이란, 나빴던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교훈을 주는지 아는 것처럼 감각 또한 시간이 지나야 감각이 키워졌음을   있다는 것이다. 기술에 대비되어 감각이 가지는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기술은 비교적 금방 배우지만 감각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의 삶에 반응하는 감각에서 태도가 형성되기 때 문이다 성장지향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 나는 지금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여기서 말하는 '바르게'란 나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는 거다.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언젠가는 외면한 시간들로 인한 고통이 오기 마련이다.



서론이 조금 길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요가가 아니더라도 삶은 나에게 다른 경로로 깨우쳐줬겠지만 나의 경우 그게 요가였다. 쉽게 말해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 보이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수박 속은 못 먹어보고 껍데기만 핥고 있었겠지. 그게 수박 맛의 전부인 줄 알면서.


그래서 글의 중간이 이쯤에서 한 번 질문하고 싶다.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요?
경험을 통해 잘(well) 사는 감각을
배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을의 시작이었지만 아직 늦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2021년 9월 4일 교실의 풍경.

원래도 조용한 요가원에 낯선 사람들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안 될 것만 같은 긴장감. 설레는 마음에 들려오는 작은 속닥거림. 자리 앞에 놓인 교재와 명패가 궁금해서 마음껏 펼쳐보고 싶지만 소리가 날까 조심조심 들춰본 건 분명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이 사람들이 3개월 동안 나와 함께할 사람들이구나.' 분명 나도 일찍 출발했는데... 한 자리밖에 남지 않은 그 자리가 나를 먼저 기다린 느낌이었다. 머쓱했다. 뛰어오느라 숨이 찼지만 숨이 안 찬 척, 차분하게 호흡하는 척, 가쁜 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는 대표 원장 선생님들과 기둥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였다.


거친 숨소리를 숨기느라 바쁜 중,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누가 등장하기 전에 향기가 카펫을 깔아주는 것처럼, 팔로산토 향기는 그렇게 세 선생님의 등장을 예고했다. 강렬한 레드카펫의 향은 아니지만 요가원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향기. 그리고 등장하는 그 순간 조금씩 들리던 속닥거리는 소리는 약속이나 한 듯 자취를 감췄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인사를 시작으로 지극히 일반적인 자기소개.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 소개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소개하지? 어떻게 정리해서 말하지?' 막상 내 차례가 왔을 때 "제가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나를 소개했다. 말을 하면서 울컥한 이유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와닿았나 보다.


이 과정이 내 마음을 얼마나 건드릴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야마구치 슈와 구스노키 겐이 말한 경험의 사후 성과 감각의 사후성을 내가 체험한 건 아닐까. 첫날 헐레벌떡 도착해 하나도 숨이 안 찬 듯 연기하는 모습은 마치 어느 정도 잘 살아 보여 지기 위한 기술만 연마하고 내 삶의 '진짜'를 들여다보지 않은 내 모습 같은 생각이 든다.


삶에서 크게 두 가지 경험이 있다. 내가 선택하는 경험과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게 되는 경험. 후자의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게 되는 경험'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경험이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경험에 있어서만큼은 경험의 과정 안에서 정말로 정말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되지 않을까. 아니,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리들에 기울일 때 우리는 잘 사는 기술이 아니라 비로소 '잘 사는 감각'과 '나를 들여다보는 감각'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럼 우리는 좀 더 진실된 '진짜'를 보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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