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害
금요일에 만났던 그 사람이
토요일에도 보자고 했다.
또 얼떨결에 승낙해버렸지만
이제 슬슬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이 극에 치닫고 있다.
저 사람은 언제까지 날 좋아할까.
저 감정은 언제쯤 식어 사라질까.
그런 것들을 가늠하고 분석하며
감정의 지속성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조롱하려 드는 내 태도가 웃기다.
의식적으로 내 행동거지를 신경 쓰고 있다.
평소보다 질문을 줄였고
평소보다 배려를 줄였다.
일부러 화장도 안 하고
선 긋는 말을 조금씩 섞는다.
저 사람이 나한테 정이 떨어졌으면 해서.
그 사람을 생각하니 생각이 또 복잡해진다.
다시 녹음된 강의를 튼다.
이렇게 또 회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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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내게 자살위험수치가 뜬 정서검사 결과를 보여주며 말을 이어가셨다.
학교 ‘wee 클래스’에서 집단미술치료를 들어야 한다 하셨다.
부모님께도 연락해서 알려야 한다 하셨다.
‘미술치료는 그렇다 쳐도 부모님이 알면 진짜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뭐라 답하셨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확실한 건, 결국 엄마한테 연락이 갔다는 거다.
그 후로 며칠 안 돼서 엄마가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돌려 돌려 아주 조심스럽게 뭔가를 물어보려는 눈치였다. 뻔했다.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레 내게 묻는 엄마에게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그거 귀찮아서 다 찍었더니 이상하게 나오던데요?”
“나도 결과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지!”
엄마는 진짜 괜찮은 거냐고 몇 번 더 물어보시다가
내 반응을 보더니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거 장난으로라도 찍지 마!”
그때 나는 엄마한테 왜 말을 못 했을까.
사실 나 정말 힘들다고 왜 말을 못 했을까.
그건 아마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아닐까.
엄마는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맞벌이 었는데도 엄마는 퇴근 후 가정 살림과 자식 교육을 다 도맡아 하셨다.
엄마에게 휴식시간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엄마는 아빠의 윽박을 다 감내해야 했다.
분명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주 많이 지쳐있으리라.
그런 엄마에게 나까지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나까지 엄마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는 없었다.
엄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짐이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홀로 버텼다. 홀로 버텨야 했다.
내가 조금 힘든 것 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
.
.
별 것도 아니었어야 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이과에 올라오면서부터
정서가 심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서울의 한 여고였다.
보통의 일반고였지만, 특징적인 게 있다면 이과가 단 52명이었다.
문제는 그 52명뿐인 이과에
전교생 240명 중 전교 30등 내 진학반 친구들 14명이 이과로 진학했다는 것이다.
9등급 제로 평가되는 입시에서 1등급은 4%까지, 2등급은 11%까지, 3등급은 23%까지.
240명 중 30등은 3등급 극초반이지만 52명 중 14등은 4등급 초반이었다. 한 등급이 떨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전교생 240명 중 전교 10등(1등급 극 후반)이었던 나는
이과 52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전교 8등(3등급 초반)이었다. 앞자리 2개가 바뀌었다.
수의대를 꿈꿨던 나는, 갑자기 수의대는커녕 인 서울도 어려운 성적이 되어있었다.
성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내가 찾은 것은 칼이었다.
2018년 1월,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이었다.
평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풀 데가 없어 샤프로 손목을 긋곤 했었는데,
샤프로는 안 됐는지 점점 칼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애의 별명은 ‘말’이었다(동물 중 말을 닮아서 별명이 말이었다.)
말은 내 중학교 동창이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를 갔지만 우리는 종종 연락했고 같이 놀러 다녔다.
말은 나보다도 정서가 안 좋았다.
말은 나보다도 일찍 자해를 시작했고
정서가 안 좋은 탓인지 몸도 많이 안 좋았다.
말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아픈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우리의 카톡에는 늘 부정적인 얘기만 돌아다녔다.
너는 보통 인간관계 때문에 우울했고
나는 보통 성적 때문에 우울했다.
우리는 서로의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배설했다.
그러나, 배설하는 정도는 말이 한 수 위였다.
말은 나에게 자신의 결핍을 필터 없이 쏟아내곤 했다.
요즘 말로,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한 거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나는 그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스스로 자처했었다.
말이 내게 자해한 사진을 보내고,
불안감에 못 이겨 새벽에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하던 도중 목을 매고 와도 다 받아줬다.
그때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아주고만 싶었다.
왜일까. 왜 받아주고만 싶었을까.
그래, 네가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일 거다.
나라도 받아주지 않으면 너는 홀로 그 아픔을 견뎌야 하고,
어쩌면 견디지 못해 증발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영웅적이고 이타적인 이유였던 거다. 딱 그것뿐이었던 거다.
그렇게 내게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아픈 너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처럼 아픈 사람이, 아니, 나보다도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
나보다도 아픈 사람이 내게 고통을 쏟아낸다.
난 그 고통을 너무 잘 알고, 그래서 감정의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졌다.
때로는 ‘힘내’라는 식의 밝은 동기부여 문구보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의 존재에 더 위로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딱 그랬던 거다.
얄팍한 위로보다 너의 결핍을 듣는 게 더 위로가 되었다.
너랑 텐션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너와 내 감정이 마이너스에서 동하는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 너의 모든 아픔을 받아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말은 내 아픔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내 아픔의 깊이까지는 몰랐다.
그야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말은 정신병원에 입원할지 말지를 운운할 정도로 아픈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은 때때로 자기 때문에 내가 우울한 거 아니냐는 식의 자조 섞인 말도 했으니
나의 결핍이 안 그래도 힘든 너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척을 했다.
자해 안 하는 척,
모르는 척,
강인한 척.
어느 날은 내가 자해를 하고 있는데 말에게서 전화가 왔다.
힘들다고 온 전화였다. 자해하고 왔단다.
나는 내 손목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며 말했다.
“자해 그거 진짜 끊기 어렵다던데… 괜찮아?”
“소독은 했어? 무슨 일인데 그래..”
자해를 남일 보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조용히 눈물을 배출하면서도 통화를 끊지 않고
말에게 모르는 척 걱정과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척을 하던 아이의 실체는 어땠나.
나는 다양한 부위에 상처를 숨기고 있었다.
하복을 입을 때는 어깨와 허벅지 안 쪽,
춘추복을 입을 때는 팔을 가릴 수 있으니 손목에 자해를 했다.
최대한 가리려고 했으나, 때때로 가려지지 않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제는 강당에 모여서 앉아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드러난 허벅지의 칼자국을 보고
친구가 허벅지에 왜 이렇게 상처가 많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나도 상처 난 지 몰랐는데? 또 어디에 쓸린 거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심장이 벌렁댔는지.
가끔씩 사람들은 자해하는 이들에게 묻곤 한다.
아프지 않으냐, 어떻게 자기 몸에 스스로 칼을 댈 수 있느냐고.
내게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놀랍도록 아프지 않다고. 그리고 칼을 갖다 대는 건 그렇게 선택적인 뉘앙스라기보다는
칼을 갖다 댈 수밖에 없어서 불가피하게 하는 거라고.
나 같은 경우엔 극도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해를 했었다.
나의 불안감은 나의 극단적인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8년의 나는 자기 자신에게 안 해본 욕이 없었다.
성적이 떨어지고 자신의 하찮은 현실을 직시하게 된 나는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가치함에 극도의 환멸을 느꼈다.
학원도 인강도 안 듣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하는 처지면서도
이해는 왜 못하고 집중은 왜 못하냐고 나를 수없이 채찍질했다.
겨우 공부 하나 제대로 못 해내는 내가 쓸모없는 병신 새끼 같았다.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때면 내게 갖가지 선 넘는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숨 쉴 때 쓰이는 공기가 아까웠고,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쓰이는 소모품들이 아까웠다.
나의 무능력함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울 때면
내게 제대로 된 건 겉만 멀쩡한 육체뿐인 것 같아서
이딴 식으로 살 거면 창녀촌에서 몸이라도 팔아서 이용가치를 보이라는 식의 망언을 퍼붓곤 했다.
상상으로 나를 몇 번이나 죽였는지 모르겠다.
창을 꽂기도 하고
총으로 쏘기도 하고
토막을 내기도 하고
목을 매달기도 하고.
상상으로 분이 안 풀릴 때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 와서 나를 패고 가줬으면 했다.
그 정도로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혐오했었다.
이렇게 한 번 자기혐오를 시작하면
부정적인 생각과 망상이 머리를 지배하면서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옥죄여왔다.
그 불안상태가 극에 달하면 칼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해를 안 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칼로 긋고 피가 맺히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칼로 그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내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날려버린 것 같아서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부를 할 때 자주 공황과 자해 충동을 겪게 되었다.
2018년의 여름, 나는 종종 칸막이 독서실에서 문제집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공황이 왔기 때문이다. 아빠한테 버려지는 망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망상 속에서 아빠는 내가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라고 말했고,
나는 아빠에게 이렇게 버릴 거였으면 차라리 빨리 버리지 그랬냐는 식의 울분을 터뜨렸다.
문제집은 눈물 자국으로 젖어들고
책상 위는 피로 젖은 휴지가 굴러다니고
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움직이질 않고.
내게는 그게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된 지도 어언 10개월,
2018년의 10월, 2학기 중간고사 시즌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자해를
5일에 한 번, 2~3일에 한 번, 결국엔 매일 같이 하게 됐다.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새 커터칼을 샀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포장도 안 뜯고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엄마랑 아빠가 얘기하는 게 들렸다.
내 성적에 대한 얘기는 아니고, 그저 엄마가 수시라는 입시 제도를 아빠한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 입에서 수시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다시 공황이 오고 불안이 극에 치달았다.
포장을 뜯고 새 칼을 꺼냈다.
그렇게 손목을 그었다.
여태껏 했던 자해 중 가장 피가 많이 나왔다.
손목에서 피가 떨어지는 걸 보다가 방을 바라보는데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칼자국으로 가득 찬 손목의 이미지,
다량의 피가 고인 방바닥의 이미지,
그리고 연쇄된 이미지의 끝에서
방 천장에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나의 이미지가 보였다.
충격적이었다.
그 이미지들 자체가 충격이었다기보다
그 이미지들이 낯설지 않은 게 충격이었다.
그 이미지 그대로 내 미래가 흘러갈 것 같고,
그게 현재의 흐름에 너무 당연한 결과인 것 같아서 충격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내가 자살하겠구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그때 나는 간접적으로 내 죽음을 체험했고
갑자기 휩싸인 생존본능에 간절히 살고 싶어 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아픔을 키웠던 아이는
자기 자신의 생존본능과 자기 연민에 의지하며 혼자서 극복을 다짐했다.
10개월간의 자해를 끊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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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2 때 연습장에 그렸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