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피형 인간의 과거(2) - 아빠의 통제와 가스라이팅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다."

by 휴먼

나를 좋아하는 이성과 만났던 그 약속 날.

이렇게 저렇게 선 그어야지 열심히 생각했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금요일에도 같이 공부하자는 말에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알겠다고 답해버렸다.

속으로 또 비상이 났다. ‘아..또 약속 잡아버렸네.. 어떡하지..?’


나는 본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둘러대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조금은 나 자신이 납득할만한 말이어야만 거짓말이 나오는데,

그냥 놀러 가자는 말이면 공부나 일 핑계로 거절했을 텐데

공부하러 가자고 하면 어떻게 거절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 다른 사람이랑 같이 공부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안된다고 하자!’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공부가 정말 잘 됐다(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사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오래 하면 약한 공황이 덮쳐온다.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제대로 정신과에서 받아본 적은 없지만(그야 병원에서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가끔씩 찾아오는 증상들로 생각해보건대

‘이거 혹시 공황 아닌가?’하고 추측해볼 뿐이다(안 좋은 생각들이 덮쳐오고 + 호흡 점점 가빠지고 + 숨소리 커지고 + 심장이 불쾌하게 옥죄어오고 + 슬픈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물리적으로 배출되는 느낌)

몇 년 동안 겪은 건데 요즘에서야 겨우 공황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보다.


아무튼 그랬는데,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공황이 덜 오는 것 같길래,

특히 나랑 관계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더 안 오는 것 같아서.


애정에 대한 부담스러움이 주는 영향보다

공황이 내게 주는 영향이 더 컸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은 또 그 사람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됐구나.


—————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다.’

어린 시절 아빠가 내게 하셨던 말씀이다.

집에서 방관자의 포지션을 맡았던 나는 그런 역할이었다.

나의 역할은 ‘손 안 가는 완벽한 아이’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산전수전 다 겪고 자수성가하신 분들이다.

정말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이고,

본인들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신,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분들이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 함께 가정을 꾸린다면,

그 가정의 분위기는 어떻게 될까?


우리 집의 분위기를 키워드로 나타내자면 ‘성실, 근검절약, 능력주의’였다.

두 분 다 그런 인생을 살아오셨기에

두 분의 자식이었던 오빠와 나는

그분들과 다른 환경에 있었음에도 그 가치관을 따라야 했다.

떼를 쓰지 않고 절약하며 사는 게 너무 당연했고,

놀지 않고 공부하며 사는 게 너무 당연했고,

일한 성과를 능력치로 입증하는 게 너무 당연했다.

개미로 사는 게 너무 당연하고, 베짱이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 집안이었다.


또 우리 집의 분위기로 들 수 있는 키워드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가부장제’다.

우리 아빠는 굉장히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분의 말이 곧 우리 가정의 진리고 법이었으며,

그 말을 거역하는 구성원들은 ‘가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굉장히 수직적인 분위기의 집안이었다.

아빠가 하는 말에는 토하나 달지 말고 따라야 했다.

그분은 ‘나는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실제로도 자신의 판단력을 굳게 믿는 분이셨다.


따라서 오빠와 나는 다른 집안에 비해 많은 통제를 받아야 했다.

무조건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게임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이것 때문에 오빠는 종종 게임하다 걸려 크게 혼났었다.)

특히 나는 여자애였기에 더 많은 통제를 받아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통금이 걸렸다. 오후 5시 통금이었다(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5시 통금, 대학교 1학년 때까지 6시 통금이었다.)

입는 옷에 제한이 걸렸고(짧은 반바지 입지 마라 등)

가는 곳에 제한이 걸렸고(홍대 가지 마라 등)

나가는 것에 제한이 걸렸다(나갈 때마다 아빠의 허락을 받고 나가야 했다.).


가끔씩 통금보다 약간 늦은 날에는

아빠 기분에 따라 벌이 있고 없고 가 달라졌다.

심했던 사례로는 날씨가 안 좋아서 아빠가 일찍 들어오라고 한 어느 날,

5시에서 3분 늦었더니 3주간 외출금지를 당한 경험도 있다.


나는 제대로 된 반항 한번 안 했다.

대신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누리려고 노력했었다.

놀고 싶으면 아빠가 잘 때를 노려서 나가거나,

독서실에 간다는 핑계로 계획을 짜서 놀러 가기도 했다.

물론 그게 아빠한테 들키고 나서는

공부하러 나갈 때마다 놀러 나가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자유를 완전히 뺏어가 놓고

내가 숨구멍을 트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만 하는 일탈로 몰아가는 게.


그분은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아빠의 것이라 했다.

자기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

나는 그분의 작품이었다.

그분이 원하는 대로 똑똑해야 했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꿈을 가져야 했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자라야 했다.


숨이 막혔다.

.

.

.

.

그렇다면 왜 나는 저것을 오롯이 감내하고만 있었을까.

왜 제대로 된 반항 한 번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내 타고난 성격에 있었다.


나는 높은 공감능력과 감정적 예민함을 기질적으로 타고난 사람이었다.

분명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내가 내 감정과 욕구를 잘 알아차렸던 것 같은데

우리 집안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커갈수록 점점 내 감정과 욕구를 무시하고 타인의 감정과 욕구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의 의존적인 기질은 전부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쪽으로 이용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는 부모님께 뭔가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갖고 싶은 게 있어도,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분들은 나의 욕구나 감정보다는

금전적인 걸 먼저 신경 쓰시는 분들이니까.

그 어린 나이에 우리 집안의 분위기와 부모님의 가치관을 이해해버렸다.

나의 요구가 부모님을 부담스럽게 할 거라는 걸 이해해버렸다. 그래서 요구하길 포기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또래들과 달리 학원을 다니지 않았는 데도 공부를 잘했다.

이유는 뻔하다. 공부를 혼자 알아서 했으니까.

초등학교 공부에 재능이 뭐가 필요한가.

그때는 공부를 했나 안 했나로 성적이 갈리는 시기이고,

나는 부모님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였기에

다른 애들이 놀러 다닐 때 나는 혼자서 부모님이 시키는 공부를 다 했을 뿐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오빠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오빠는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에게 온갖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혼나야 했다.

공부를 했으면 이딴 성적이 나오면 안 된다며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었어야 했고,

이게 사기 치는 게 아니면 지능이 딸리는 거라며 친척들 앞에서 ‘저능아’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엄마는 오빠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를 왜 저 지경으로 만들었냐’며 온갖 탓을 감내해야 했다.

나는 그 모든 걸 옆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지켜봐 왔다.


나한테는 두 가지 압박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잘나지 않으면 나도 오빠처럼 저 지옥을 버텨야 한다는 공포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잘나지 않으면 엄마는 내 무능함의 죄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압박.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학원 하나 안 다니고 높은 성적을 유지해왔다.

한 번도 공부를 못했던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즉슨, 한 번도 공부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한 번도 가족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엄마랑 아빠는 늘 오빠를 걱정했고, 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잘하는 애였으니까.

그분들이 신경 써야 하는 애는 오빠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동 떨어진 나는

혼자서 점점 고립되어갔다.


고립된 아이는 어떻게 자랐나.

몇 년 전, 학교에서 적었던 학습지를 오랜만에 발견했다.

학습지는 현대의 심리검사(SCT 문장 완성검사)를 닮아있었다.

학습지 속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이라는 말에는

‘무능력한 자기 자신이다.’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2014년,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다.


중학교 시절, 나는 약간의 강박성이 보일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내가 발을 담고 있는 분야라면 뭐든지 1등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외모, 성적, 체육, 노래, 미술, 춤 등등 안 따지고 모두 다.

나보다 잘난 아이가 있으면 그게 그렇게 견디기가 힘들었다.

열등감이 나를 장악했고, 나는 더 잘난 사람이 되고 싶어 발악했다.

덕분에 롤링페이퍼를 쓰게 되면 ‘다재다능하다’라는 말을 안 들을 때가 없었다.

그 말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쌓여온 스트레스는

중학교 3년간 강박 섞인 완벽주의 성향을 타고 조금씩 자라서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야 터졌다.


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어떤 밀폐된 공간에서 담임선생님은 내게 종이 하나를 건네셨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서검사 결과였다.


자살위험수치였다.

.

.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회피형 인간의 과거(1)-뭐가 나를 회피형으로 만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