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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인간의 과거(1)-뭐가 나를 회피형으로 만들었나

과거, 아빠의 사랑이 그렇게나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by 휴먼

술에 취해 아리까리했던 며칠 전,

방심했을 때 만들어버린

나를 좋아하는 이성과의 약속.


약속 시간을 앞두고 내가 하는 것은,

‘앞으로는 이렇게 말해서 선을 그어야겠다.’는 식의

철벽 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별의별 생각을 다하다가 뇌에 과부하가 와서,

우뇌도 힘들고 좌뇌도 힘든 기분이라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브런치에 글을 쓰러 들어왔다.

어쩌다 이런 극도의 회피형 인간이 만들어졌나,

과거 회상도 할 겸 좀 적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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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을 회피하게 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인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같이 태권도 학원을 다녔던 한 남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도망갔을 때,

그때 적었던 일기에서는 분명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썼었다.

그때의 나는 타인의 사랑을 받았을 때 행복감을 느꼈던 거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내가 관심을 가졌던 남자들에게 오히려 툴툴댔던 기억이 난다.

틱틱대고 마음을 부정하고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었다.

그때 그 미숙했던 어린애 같은 습관이

22살 현재까지 이어질 줄은 누가 알았던가.


나는 꽤나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자신의 성격을 못 이겨 과거에는 분노조절장애 약까지 복용하셨던 아빠,

그런 가장 아래에서 오빠, 나, 엄마가 지배당하는 구조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편애를 받았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 들었던 게 그 이유였다.

아빠는 나보다 3살 많은 오빠를 나와 비교하며 자주 까내리곤 했다.

‘어떻게 3살 어린 동생보다 멍청하냐’라는 식으로.

우리 엄마도 아빠한테 멍청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자주 들으셨다.

아빠 말에 반박하면 엄마는 닥치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아빠 말대로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지적해도 고치지 않는다며 ‘멍청한 짐승’과 비교해 엄마를 까내리시곤 했다.


그 반면 나는 아빠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높았다.

본인 피셜 자기는 옳고 논리적인 말만 한다고 하시는데

내가 어렸을 적부터 그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우월한 자신의 말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도 우월한 존재로 봐준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머리 좋은 애’로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나는

아빠한테 ‘SKY도 갈 수 있는 머리’, ‘혼자서 의대도 갈 재능’으로 칭송받으며

우리 집 구성원 중 유일하게 아빠의 눈 밖에 나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


어렸을 적, 본능적으로 판단한 우리 집에서의 나의 위치.

그건 방관자였다.

가해자는 아빠, 피해자는 오빠랑 엄마.

나는 방관자.

왜냐하면 나는 머리가 좋고 말을 잘 들으니까.

나의 아빠는 자주 엄마와 오빠에게 화를 내며 인격을 깎아내렸고,

나를 보면서는 칭찬과 긍정적인 평가를 들이미셨다.


중학교 때였던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빠가 엄마와 부부싸움을 하고 잔뜩 화를 쏟아낸 직후,

아빠는 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나를 부르셨다.

나를 보면서 아빠는

엄마랑 오빠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나를 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인정받았다는 기쁨도, 만족감도 아닌

부담스러움이었다.

그 애정이 그렇게나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총애를 받으며

아빠는 종종 나에게 애정표현을 하셨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애정표현을 달갑게 받은 적이 없다.

아빠가 나보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나는 마지못해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늘 머릿속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아빠의 사랑을 단 한 번도 순수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고

나는 아빠에게 사랑을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줘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 아빠라는 존재가 정말 거대했던 만큼

아빠에게 사랑을 회피했던 지난날의 습관이

22살 현재까지도 관성처럼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게 나를 회피형 인간으로 만든

나의 첫 번째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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